[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47>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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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
―강해림(1954∼ )

산 입구 천막식당에 중년의 남녀가 들어선다
가만 보니 둘 다 장님이다
남자는 찬 없이 국수만 후루룩 말아 먹곤
연거푸 소주잔을 비워대는데
여자는 찬그릇을 더듬어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젓가락을 든다

그릇과 그릇 사이

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
푹푹 발목 빠지고 무릎 깨지게 했을까
좌충우돌 난감함으로 달아올랐을 손가락 끝
감각의 제국을 세웠을까

그곳은 해가 뜨지 않는 나라
빛이 없어 캄캄하여도 집 찾아 돌아오고
밤이면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느라 가위로 피 묻은 탯줄을 잘랐을 테고

이윽고 얼굴이 불콰해진 남자는
한 손엔 지팡이, 한 손엔 여자 손잡고 제왕처럼 식당문을 나선다
꽃구경 간다
복사꽃 날리고
꽃향기에
어둠의 빛 알갱이가
톡톡,
꽃눈처럼 일제히 터져 나와 눈부시고


소설가 조세희 선생이 엮은 최민식 사진집 ‘열화당 사진문고 22’를 꺼내 본다. ‘부산 광복동, 1962’ 한 건물의 대리석 벽에 기대서서 적선을 기다리는 할머니와 청년, 두 사람 다 시각장애인이다. 할머니가 건네는 얘기를 청년이 미소를 띤 채 듣고 있다. 이 미소가 잊히지 않았었다. 1962년이면 50년도 더 전. 이후 그 삶에 ‘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 있었을까. 그래도 그의 것인 미소는 그를 떠나지 않았을 테다.

화자는 꽃놀이를 갔다가 들른 천막식당에서 역시 꽃놀이하러 온 시각장애인 남녀를 본다. 꽃나무 밑을 거닐며 공중에 휘늘어진 나뭇가지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꽃을 보고 즐기자는 꽃놀이에 앞 못 보는 사람들이라니. 실례인 줄 알면서도 화자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릇과 그릇 사이’에도 있는 허방다리. 그렇잖아도 삶에는 ‘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 있는데 남보다 크게 불리한 조건으로 삶을 헤쳐 나가는 이들! 그 삶에 위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 손엔 지팡이, 한 손엔 여자 손잡고’ 식당을 나서는 남자가 ‘제왕처럼’ 보인단다. 화자는 그이들을 통해 ‘꽃향기에/어둠의 빛 알갱이가/톡톡,/꽃눈처럼 일제히 터져 나와 눈부신’ 감각을 깨친다.

황인숙 시인
#강해림#얼마나많은허방다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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