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의 새벽편지]“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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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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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정호승 시인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문득 나와 내 인생을 객관화해 각자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사랑하던 남녀가 다정히 손을 잡고 가다가 잠시 손을 놓고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나’ 하는 의구심을 지니고 서로를 응시하듯이.

그때 감전이라도 된 듯 화들짝 놀라 뒷걸음쳤다. 나는 내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으나 내 인생은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다는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내 인생을 위해 어떠한 어려움도 무릅쓰고 모든 것을 다 해주었으나 내 인생은 나를 위해 해준 게 뭐가 있나 하는 생각이 삭풍처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날 밤, 힘없이 인생의 손을 놓은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인생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생이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가난과 이별과 거듭되는 실패의 고통 속으로 그토록 토끼몰이 하듯 몰아넣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고통의 도가니에 빠져 허우적거린다고 생각되자 인생에 대해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래서 그날 밤 ‘술 한잔’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다.

‘인생은 나에게/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눈이 내리는 날에도/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시는 분노에 의해 써지지 않으나 이렇게 내 인생을 시로써 분노하고 원망했다.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게 인생

‘술 한잔’이란 사랑의 은유적 표현이다. 누군가가 “다음 주에 술 한잔 살게” 하고 말했다면 그건 그만큼 관심과 애정이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누가 술 한잔 사준 적 없다면 그건 그만큼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는 것은 인생이 결코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는 절망감의 극명한 표현이다. 돌연꽃이란 석련(石蓮)을 말하는데 돌에 새겨진 연꽃이 다시 피었다 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석련이 피었다 져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절망감의 무게가 무겁다는 의미다.

인생에는 형식도 정답도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어떤 정형화된 모범답안 같은 형식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내겐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고통을 주는가.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 죄밖에 없다. 그런데 내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절대자를 원망했다. 내게 고통을 주는 어떤 절대적 행위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후미진 골목의 블록 담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그를 증오하고 원망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런 생각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절감하고 있다. 인생이 나에게 술을 사줘도 한없이 많이 사주었으며 부모자식과 같은 깊은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이 결국 고통의 방법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지금 한 인간으로서 건강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생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금은 분노와 원망에 의해 그런 시를 썼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다행히 시는 은유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은유의 숲 속에 역설과 반어의 잎으로 짐짓 나를 덮는다.

인생에는 형식이 없다. 설정된 어떤 형식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 형식 속에 실패와 좌절의 고통은 설정돼 있지 않고 소원의 성취와 성공의 기쁨만이 설정돼 있다는 게 더 큰 문제일 뿐이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에 형식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쓴맛을 보지 않고는 결코 단맛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이 인생의 정답이다. 그래서 요즘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한테 일어나는 불행한 일이 이제 나에게도 일어나는구나. 내 차례구나’ 하고 겸허히 받아들인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원망할 것이다. ‘내 인생이 왜 이러나. 왜 이렇게 고통이 많고 풀리지 않나’ 하고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하여 급기야 나처럼 인생이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고 분노할 것이다.

분노-원망으로 詩썼던 사실 부끄러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생은 나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는 인생의 마음이 어머니와 같다. 어머니가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인생도 아무런 조건 없이 나에게 ‘술 한잔’을 사준다. 어떠한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의 술을 사준다. 그래서 요즘은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었다’라고 고쳐 읽는다. 이 시를 노래로 부른 가수 안치환 씨가 “인생이 정말 술 한잔 사주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사줘도 너무 많이 사줬다”고 대답했다.

정호승 시인
#인생#친구#술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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