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원수]‘노동에 그을린’ 김선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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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수 사회부 차장
정원수 사회부 차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출범 직후인 1988년 초여름 경기 양주시 송추에서 1박 2일 일정의 워크숍이 열렸다. 창립회원 51명 중 절반 정도가 모인 이 자리에는 민변이라는 이름을 지은 리더인 41세 조영래 변호사가 참석했다. 그리고 당시 조 변호사 밑에서 ‘약자를 위한 변론 활동’을 배우던 27세 김선수 변호사도 있었다. 김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을 다닐 때 조 변호사와 저녁 식사를 겸한 면접을 한 뒤 연수원을 졸업하며 조 변호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김 변호사는 민변 워크숍 참석자 중 3번째로 젊었다.

훗날 민변의 역사를 바꾼 두 명의 지방 회원도 워크숍에 잠깐 들러 환영을 받았다. 당시 40대 초반이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보다 7세 아래지만 ‘오랜 친구’인 문재인 대통령이 창립 회원으로서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4월 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스타 정치인’의 기질을 보였지만 문 대통령은 그때도 지금처럼 과묵했다고 한다.

2년 뒤 애연가 조 변호사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 김 변호사의 인연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다시 이어진다. 김 변호사는 2005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밑에서 사법개혁비서관으로 근무했다. 처음 공직자가 돼 국민참여재판 등 ‘혁명이 아닌 개혁’을 설계했다. 당시 동료들은 그에 대해 “행정 능력이 상당하다”고 평가했다. 이번엔 문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관이 될 기회를 얻었다.

김 변호사는 30년 전 로펌 변호사들이 한 달 치 봉급으로 300만 원을 받을 때 100만 원을 벌었지만 만족했다. 변호사가 되기 전 대학 시절엔 ‘5·16장학회’ 장학금으로 학비를 전액 충당했고, 고등학교 때는 도시락 하나를 점심과 저녁용으로 나눠 허기진 배를 채웠다. 전북 진안의 산골 화전민이던 아버지는 김 변호사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가 서울역에서 일용직 하역노동을 했다. 어머니는 공장에 다녔다.

우신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제일 먼저 등교하고, 가장 늦게 하교했다. 한 고교 동창은 “집중호우로 등교가 취소된 날에도 김선수는 혼자 학교에 가서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별명이 ‘공부선수’였다”고 회상했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여민(黎民)’이라는 호를 그에게 지어줬다. ‘노동으로 검게 그을린 평범한 백성’이라는 뜻이다. 그 자신이 여민이라는, 또 평생을 여민들 편에 섰다는 김 변호사는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작고한) 담임선생님의 뜻을 헤아려 본다”고 한 적이 있다.

변호사로서 맡은 첫 사건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서울 망원동 수재 사건 소송에서 “국가가 홍수 방지 의무를 소홀히 해 국민에게 피해를 준 것이며, 피해 주민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국민이 국가권력에 공동으로 맞선 첫 집단소송이었다. 이후 포항제철 퇴직금 소송, 외환위기 직후 채용 내정 취소 사건 등을 맡아 노동자 편에서 변론 활동을 했다.

그가 대법관으로 임명되고 대법원 청사 11층에서 전원합의체 회의가 열리면 대법원장과 다른 대법관 등 나머지 12명은 긴장을 늦추지 못할 것이다. 판사, 검사를 거치지 않은 유일한 재야 변호사 출신이기 때문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관 후보 추천에 관여한 한 인사는 “회의 때 ‘대법원장의 의중은 김선수가 아니다’라는 말이 오갔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퇴임한 지 10개월 만에 그는 대법관 후보자가 됐다. 국회 인준을 앞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다. “마음을 열고, 의뢰인의 말을 듣고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변호사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하물며 최고 법관은 어떨까. 더 자신을 낮추고, 동료들에게 정성을 다하길 바란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김선수#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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