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북한에서 자라며 보았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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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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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거부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보도하기로 결정하는 영화 ‘1987’의 한 장면.
동아일보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거부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보도하기로 결정하는 영화 ‘1987’의 한 장면.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29999호.

오늘자 동아일보 지령(紙齡) 번호다. 내일(26일)이면 지령 3만 호다.

2만 호 발행이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6년 10월 1일이었으니 3만 호 발행까지 31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이 기간은 내가 철들어 살아온 시대와 일치한다.

지령 3만 호를 맞아 동아일보에는 ‘나와 동아일보’라는 연재 시리즈가 게재되고 있다. 주로 한국 명사들의 추억담이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남쪽에서만 영향을 미쳤던 게 아니다. 동아일보는 북에서 자란 나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다행히 노동신문을 구독하는 집에서 자랐다. 노동신문은 누구나 구독할 수 없고 일정한 직책이 있어야 당에서 구독을 허락하는 신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노동신문을 정독했는데 5면이 남조선 면이다. 1980년대 남조선 면엔 늘 각종 시위 소식이 실리곤 했다.

이 지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신문이 동아일보였다. 북한 당국도 나름 공신력을 증명하려 했던지 ‘동아일보에 따르면…’이라는 리드로 남조선 소식을 보도했다.

최근 영화 ‘1987’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 1987년 노동신문도 남조선 소식을 연일 신이 나서 보도했다.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숨졌다는 동아일보의 특종 보도에 이어 6월 민주항쟁의 생생한 장면까지, 불의에 굽히지 않은 동아일보의 용기는 노동신문에 그대로 옮겨졌다.


최루탄으로 뿌연 서울의 거리와 곤봉을 휘두르는 백골단의 사진으로 도배하던 노동신문은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김중배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명칼럼도 인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나는 여러 대학에서 벌어지는 시위 중계 보도를 보면서 “남조선에서 제일 좋은 대학은 어느 대학일까” 하고 궁금해 하기도 했다.

노동신문은 가끔 독재정권의 언론 탄압을 비판하는 백서도 실었는데 이때마다 동아일보의 백지광고 사태도 빠짐없이 거론됐다. 1992년부터 발간된 김일성 회고록에도 동아일보는 자주 거론됐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까지 회고록에서 동아일보는 19번이나 거론됐다. 김일성은 동아일보를 매우 호의적으로 서술했다. 가령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소개하며 “우리 부대의 모든 대원은 ‘동아일보’ 편집 집단이 취한 애국애족적인 입장과 용단에 열렬한 지지와 연대성을 보내었다”고 추억하는 식이다.

북한은 창작의 자유가 극히 제한됐지만 남쪽을 소재로 한 작품은 자주 나왔다. 그런데 여기엔 기자가 많이 등장한다. 숨기는 진실을 폭로하며 권력과 싸우는 정의로운 인물을 설정하기엔 기자란 직업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1990년대 초반의 한 소설은 새벽까지 과음하고 늦잠을 잔 기자가 여유롭게 출입처로 출근해 당국자들을 만나 진실을 캐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그때 ‘남쪽 기자들은 늦잠 잘 때도 있고, 아무 데나 들어가 자유롭게 누구와도 만나도 되는구나’ 싶어서 한국의 기자 생활을 부럽게 상상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성(性)고문 사건을 폭로했는데, 나는 당연히 그가 동아일보 기자였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북한에서 성장한 내가 서울에 와서 동아일보 기자가 된 것은 확률로 설명하긴 어려운 기적이었다. 발령받은 첫 부서의 차장석엔 ‘새벽까지 과음하고 오전 늦게 출입처에 나갔다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대특종을 했던’ 선배가 앉아 있었다.

어느덧 남쪽에 와서 기자가 된 지 16년째를 맞았다. 후회 없는 삶이었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탈북해 와도 동아일보 기자를 할 것이다.

동아일보에 대한 북한의 ‘짝사랑’이 싸늘하게 식은 지 오래다. 걸핏하면 동아일보의 보도가 입맛에 맞지 않다고 삿대질을 하곤 한다. 하지만 저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제 통치와 독재정권하에서 목숨 걸고 기개를 지켰던 ‘100년 언론의 전통’이 그 정도의 협박 따위에 무너질 일이 절대 없다는 것을. 북한이 3대 세습 독재를 이어가고 핵과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는 한 좋은 평가를 받는 일도 없을 것이란 것을.

1986년 동아일보 창간 2만 호엔 3만 호가 발행되는 30여 년 뒤의 세상을 예측한 특집 기사가 있다. 첫 번째 예측은 “최소한 남북 간 왕래가 자유롭고 무역거래도 활발해지는 민족적 통일은 이루어질 것”이란 전망이었다. 빗나갔다.

동아일보가 4만 호를 발행하려면 30여 년이 더 흘러야 한다. 내 기명 기사는 아마도 제호 3만 몇 번째에서 끝나 있을 것이다. ‘동아일보 3만 호’를 맞이하는 지금, 나의 최대 소원은 북한 사람들이 내가 쓴 기사를 직접 읽는 날을 보는 것이다. 다행히 지금까지 내가 원했던 일은 거의 이뤄졌다. 동아일보에 통일의 벅찬 감동을 전하는 나의 기사가 실릴 날도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동아일보#동아일보 3만호#나와 동아일보#노동신문#영화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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