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하태원]하와이에서 만난 남북한

  • Array
  • 입력 2012년 5월 22일 03시 00분


코멘트
하태원 논설위원
하태원 논설위원
세계 유명 휴양지의 한 곳인 미국 하와이에는 한 세기 전 한국의 자취가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경복궁을 본떠 수려한 단청으로 지은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센터에는 1903년 1월 사탕수수농장 근로자로 시작된 한국의 첫 미국 이민사의 고통어린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와이 이민감독관이 낸 모집 공고는 ‘매년 어느 절기든지 직업 얻기가 용이한데 신체가 강건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은 안정되고 장구한 직업을 얻기 무난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90년 인생 중 25년을 하와이에서 보낸 이승만 전 대통령의 흔적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조국 독립의 터전으로 삼겠다며 세운 한인기독교회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망향(望鄕)의 한을 달래며 생을 마친 ‘마우나라니너싱센터’, 하야 직후 이주해 한국에 돌아갈 날을 손꼽았던 목조주택에도 옛 자취가 남아 있다.

일본의 패망을 불러온 계기가 된 진주만 폭격 현장에서는 2010년 진수한 한국의 두 번째 이지스함 ‘율곡이이함’을 만났다. 북한이 실용 위성이라며 쏘아 올렸던 ‘광명성3호’의 궤적을 추적했던 배다. 8월 4일까지 미군 주도로 22개국이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실시하는 환태평양 연합해상훈련(림팩)에 처음으로 참여한다. 이지스함의 마지막 전력화 단계인 ‘전투체계 함정종합능력평가’도 받는다.

하와이대가 북한 연구의 메카로 불릴 때가 있었다. 서대숙 전 교수는 1960년대 중반 조선공산주의 운동사를 다룬 논문에서 김일성의 항일빨치산무장 투쟁경력을 학문적으로 논증한 뒤 하와이대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필자는 북한 관련 희귀본이나 기밀문서라도 있을까 싶어 뻔질나게 도서관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서 전 교수는 은퇴와 동시에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 설치할 ‘서대숙문고’에 기증하기 위해 자신이 모은 3700여 점의 북한 자료를 가지고 나갔다.

하와이대 해밀턴도서관엔 광복 이후 북한의 정기간행물과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적 이론적 지침을 담은 출판물인 ‘노작(勞作)’이 온전히 보존돼 있다. 북한 자료의 입수 과정을 묻는 필자에게 한국학 사서 양윤림 씨는 북한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보여줬다. ‘주체 99년(2010년) 3월 25일 조선출판물교류협회 곽철수’ 명의의 한글로 보내온 이 편지는 하와이대와 정기간행물 공급과 관련해 직접 계약을 맺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때까지 북한의 미국 대리점 역할을 했던 ‘고려종합무역상사’의 대표였던 김모 씨가 건강상 이유로 업무 진행을 매끄럽게 하지 못했다. 양 씨는 북한과 직접 거래할 경우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다양한 출판물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편지에 적힌 주소로 e메일을 보내봤지만 계속 반송됐다. 동료 사서들과 학교에 북한과의 직거래 추진을 타진했으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장고 끝에 결국 직거래를 포기했다.

하와이대는 20여 년 전 북한에 수천 달러의 돈을 떼인 적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 하와이대는 달러화로 미국 은행에 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 은행에 마르크화로 입금하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직거래를 성사하려 했다. 그러나 선불을 내고 주문했던 책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조선출판물교류협회에 수차례 확인을 요청해도 ‘보냈다’는 답만 돌아왔을 뿐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북한은 1994년 제네바합의와 2005년 6자회담 9·19공동성명을 휴지통에 버렸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맺은 무수한 남북 합의도 비웃었다. 북한에 일개 도서관과의 계약은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만 세계 어딜 가나 북한은 이해할 수도, 신뢰할 수 없는 은둔의 나라란 낙인이 찍혀 있다.

―하와이에서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
#오늘과 내일#하태원#남북한#남북관계#하와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