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주성원]‘0 대 162’ 조롱 깬 아이스하키의 도전… “평창에서 이변을 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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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

《“한국 아이스하키팀이 캐나다팀과 붙으면 0 대 162로 질 것이다.” 2011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뒤 미국 스포츠채널 ESPN이 내보낸 기사다. 척박한 한국 아이스하키 환경에 대한 조롱이었다. 재계에서 알아주는 아이스하키 마니아인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63)은 기사를 보면서 울분을 속으로 삭였다. 사실 당시만 해도 한국 아이스하키 실력은 외신들의 그런 평가를 대놓고 반박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정 회장은 절치부심했다. 국내 대표적인 실업팀인 ‘안양 한라 아이스하키단’에 더욱 애정을 쏟았다. 2013년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을 맡고부터는 한국 아이스하키 전체의 실력 향상을 위한 큰 그림을 그렸다. 》

퍽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정몽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은 “어떤 승부가 날지 모르는 의외성이 아이스하키의 매력”이라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한국 아이스하키의 도전을 평창 올림픽에서 확인해 달라”고 당부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정몽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은 “어떤 승부가 날지 모르는 의외성이 아이스하키의 매력”이라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한국 아이스하키의 도전을 평창 올림픽에서 확인해 달라”고 당부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주성원 논설위원
주성원 논설위원
그런 노력의 결과물일까. 지난해 12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유로하키투어 채널원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캐나다를 상대로 초반 리드하는 등 분전했다. 2-4로 석패했지만 기대 이상의 선전(善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 랭킹 4위 핀란드, 3위 스웨덴전에서도 후반에 밀려 각각 1-4, 1-5로 패했으나 전반은 거의 대등하게 싸우는 등 경기 내용이 좋았다.

이번 평창 겨울올림픽에 한국은 남녀팀 모두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한다. 그동안은 자력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낼 실력이 안 됐다. 올림픽 첫 출전 생각에 선수들만큼이나 가슴 설렌다는 정 회장을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송파구 한라그룹 사옥에서 만났다.

―세계 강호가 집결하는 올림픽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성적을 기대할 수 있겠나.

“올림픽을 앞두고 마지막 담금질이 한창이다. 남자팀은 2월 러시아, 슬로베니아 등과 연습경기를 가질 예정이다. 여자팀은 미국 전지훈련 중이다. 남자는 12팀 중 8팀이 겨루는 2차 라운드 진출이 목표다. 한 경기는 이겨야 가능하다. 여자 역시 1승을 목표로 훈련하고 있다. 세계 랭킹 남자 21위, 여자 22위인 현실에서 쉽지 않지만 홈팀이라는 이점이 있다. 도전 의지가 강하다.”

―‘채널원컵’에서 보여준 한국의 선전이 팬들 사이에서 화제다. 이 정도면 전력이 기대만큼 올라왔다고 봐도 되는가.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은 회원국을 실력별로 구분해 철저히 그 안에서 맞붙는 시스템을 운영한다. 대회도 1부 리그, 2부 리그, 3부 리그 등으로 나눠 열린다. 2부 리그(디비전1 A그룹)에 속해 있던 한국이 2017년 4월 열린 A그룹 세계선수권에서 2위를 차지해 1부 리그(톱 디비전)로 승격한 덕에 채널원컵에 참가할 수 있었다. 캐나다는 물론이고 핀란드 스웨덴 같은 팀들은 우리와 경기는커녕 만나 주지도 않던 팀이다. 그런 팀들과 싸워 봤다는 경험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그들은 천외유천(天外有天), 하늘 밖의 하늘이다. 빈틈이 없다. 올림픽에는 그런 팀들만 온다. 그래도 두 경기는 우리가 먼저 골을 넣고 앞서갔다는 점에서 기대가 생겼다. 많이 배웠다.”

IMF로 모기업 팔면서도 팀은 살렸다

정 회장은 만도기계 사장이던 1994년, 에어컨 홍보를 위해 실업팀 ‘만도 위니아’(현재의 안양 한라)를 창단하면서 아이스하키에 빠져들었다. 아이스하키가 너무 좋아 협회장까지 된 경우다.

―협회장을 맡은 뒤 가장 감격적인 순간은 언제인가.


“승격을 확정한 세계선수권 마지막 경기 승리다. 사상 처음 톱 디비전으로 올라갔으니. 우크라이나와 연장전까지 승부를 못 가려 슛아웃(축구의 페널티킥 같은 규정) 끝에 이겼다.”

경기가 끝난 뒤 정 회장은 선수들을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 한국 아이스하키가 짧은 시간에 발전한 데는 정 회장의 공이 크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2000년 만도를 사모펀드에 매각할 때도 아이스하키팀만은 그룹에 남겨뒀다. 한국 실업 4개 팀 중 3개 팀이 해체될 때다. 상대할 팀이 없자 정 회장은 2003년 일본 4팀을 끌어들여 아시아리그를 창단했다. 지금은 한국 3팀과 일본 4팀, 러시아 1팀 등 8개 팀이 경기하는 국제 리그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아이스하키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올라섰다.

―아이스하키의 매력을 설명한다면….

“아이스하키는 오프사이드와 아이싱, 파울 같은 몇 가지 규칙 위반을 제외하고는 골이 들어갈 때까지 경기가 중단되지 않는다. 사이드라인이 없어 퍽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일은 극히 드물다. 끊임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역동적인 경기다. 승부 측면에서 보면, 이변이 많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둥글납작한 퍽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골리(골키퍼)가 쳐낸 퍽이 다시 공격수 발 앞에 떨어져 슈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약팀이 강팀을 상대로도 골을 넣고 승리할 기회가 생긴다. 이런 의외성이 아이스하키의 매력이다.”

최고의 감독이 체질을 바꿨다

―아직은 평창 올림픽 열기가 좀처럼 달아오르지 않는 것 같다.

“2002년 한일 월드컵도 개막 직전에는 썰렁하지 않았나. 올림픽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 다만 국민들이 현장을 찾아 선수들에게 기를 팍팍 넣어줬으면 좋겠다.”

―피겨스케이팅 등에 비하면 한국에서 아이스하키는 비인기종목인데….


“일본에 가보니 경기장 매표소 앞에 줄을 서더라. 참 부럽다. 우리도 어떻게든 인기 종목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IIHF 쫓아다니며 올림픽 출전권 달라고 졸랐다. 남들이 뛰는 모습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우수한 지도자 영입하고 외국인 선수 귀화시켜 수준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IIHF는 2010년 밴쿠버 올림픽부터 개최국 자동출전권을 없앴다.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 자동출전한 이탈리아의 수준이 너무 떨어져 흥행에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발로 뛰며 IIHF 관계자들에게 개최국의 참가가 흥행에도 도움이 된다며 자동출전권 부활을 역설했다. 약속대로 캐나다, 미국 선수들을 귀화시켜 대표팀에 합류시켰고 해외에서 지도자도 영입했다. 남자대표팀은 한국계 캐나다인 백지선 감독이, 여자대표팀은 미국인 세라 머리 감독이 이끌고 있다. 백 감독은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피츠버그 펭귄스에서 뛰며 스탠리컵(우승컵)을 두 차례나 들어올린 ‘레전드’다. 아이스하키계의 거스 히딩크 감독이라는 말도 나온다.

―협회장으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외국에서 우수한 지도자를 영입한 것이다. 아이스하키가 발전하려면 지도자와 선수, 심판의 3가지 요건이 잘 들어맞아야 한다. 그중 1 순위가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어떤 측면에서 그런가.

“백지선 감독을 보자. 최고 리그에서 경험한 전문성이 있다. 백 감독에게 배우면서 선수들이 경기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또 경기와 훈련에만 집중하게 한다. 경기 외적인 요소로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 없다. 대표팀 선발에서도 공정하고 납득할 만한 인사 시스템을 운영한다. 대표팀 발표에 앞서 후보에 속했던 선수들을 모두 불러 면담한다. 탈락한 선수들에게는 ‘너는 이 점이 모자라 이번에는 뽑히지 못했지만, 다음에 보완하면 기회가 있다’고 말해준다. 따지고 보면 어떤 조직에서든 필요한 리더십이다.”

그러면서 정 회장은 “한국 대표팀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팀”이라고 강조했다.

“남녀 모두 경기를 하면 할수록 우리 팀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평창 올림픽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올림픽 이후 한국 아이스하키의 계획은 뭔가.

“가깝게는 5월에 남자 세계선수권을 준비한다. 멀리는 아이스하키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 올림픽에서 성공해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지금 한국은 고교팀 6개, 대학팀 5개, 실업팀 3개가 전부다. 이런 환경에서 이만한 성적을 내는 선수들이 대단하다.”

느리면 진다… 경영도 빙판위 승부

―기업 경영과 아이스하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기업 경영과 아이스하키는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스피드다. 아이스하키는 무엇보다 스피드가 중요한 경기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뒤처진다. 둘째는 팀워크다. 아이스하키는 선수 다섯 명이 톱니바퀴처럼 움직여야 한다. 기업도 경영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마지막은 섬세함, 즉 디테일이다. 아이스하키에서 공격을 아무리 많이 해도 골문 앞에서 섬세하고 정확한 슛이 없으면 골이 들어가지 않는다. 기업도 디테일에 약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아이스하키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앞서 이야기했듯 아이스하키는 이변이 많은 스포츠다. 이기고 있다고 방심하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우리 팀도 역전패를 많이 당했다. 경영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놓으면 경쟁에서 뒤처진다.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기업인으로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나.

“2008년 만도를 되찾아 왔을 때다. 2018년이 만도를 찾아온 지 꼭 10년째 되는 해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2018년부터 3개년 계획을 세워 경쟁력 강화에 나선다. ‘제대로, 미래로’라는 슬로건도 내걸었다.”

만도는 자동차 부품 분야에서 매출 세계 40위권을 유지하는 견실한 회사다. 브레이크, 스티어링 휠 등 다양한 부품을 생산한다. 특히 자율주행 기술력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 회장은 지난해 11월 만도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만도의 미래를 위한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


“부품회사의 성장 동력은 기술이다. 연구개발(R&D)에 매출액의 5%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해외 우수 인력 유치를 위해 미국 디트로이트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연구소를 설립했다. 실리콘밸리에 지점을 두고 유망 스타트업들과 ‘연합군’을 형성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우리가 속한 자동차업종은 2018년이 한국에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 특히 중국과 미국에서 얼마나 좋은 실적을 올리는지가 중요하다. 해외시장에서 승부를 봐야 하는데….”

―R&D가 중요한데 최근 세액공제를 줄이는 등 정부 지원이 줄어드는 것 같다.


“정부 정책을 두고 뭐라 논평할 수 있겠나. 다만 기업이 추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쪽으로 격려해줬으면 좋겠다.”

현역 기업인이라서인지 마지막 질문에는 말을 아꼈다. 정 회장은 ‘재계의 부도옹(不倒翁·오뚝이)’이라는 고 정인영 한라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조카다. 1962년 현대양행을 설립한 정 명예회장은 1980년 정권을 장악한 군부에 현대양행 창원공장을 빼앗기며 사업 기반을 잃었지만, 만도기계를 굴지의 부품사로 키워 다시 일어섰다. 1989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휠체어를 타고 경영 현장을 찾았다. 아이스하키 불모지 한국을 세계 톱 디비전으로 끌어올리고, 팔았던 만도를 8년 만에 되찾아온 정 회장의 ‘뚝심’이 부친을 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 접견실에 걸린 ‘학여역수행주 부진즉퇴(學如逆水行舟 不進則退)’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배움은 강물을 거슬러 배를 모는 것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밀린다는 뜻이다. 한국아이스하키의 ‘선장’인 정 회장의 모습이 이 글과 겹쳐 보였다.

주성원 논설위원 swon@donga.com
#정몽원#대한아이스하키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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