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펜으로 써야 정성 담겨” 김훈 “연필 쓰면 몸이 글을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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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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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 육필 원고 고수하는 소설가들

소설가 최인호 씨의 원고. 여백미디어 제공
소설가 최인호 씨의 원고. 여백미디어 제공
소설가 최인호 씨(66)는 문단에서 소문난 악필(惡筆)이다. 보통 사람들은 읽기 힘든 암호 수준이다. 하지만 1963년 등단 이후 원고지에 써내려가는 육필 작업을 고수하고 있다. 원고지 1200여 장에 담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탈고한 뒤 최 씨는 출판사 직원을 작업실로 불렀다. 그는 원고지를 직접 읽었고 직원은 컴퓨터에 받아 쳤다. 간간이 제대로 옮기고 있는지 살폈고, 교정도 봤다. 이 작업은 일주일 동안 이뤄졌다. 2008년 침샘암 발병 후 장시간 말을 하기 어려운 그가 힘겹게 친필로 쓰고 읽는 고통을 감내한 것이다.

최 씨는 펜을 고수하는 이유에 대해 “한 자 한 자 소설 쓰는 정성은 펜이어야 가능하다. 또 ‘나를 떠나가는 문장’에 대한 느낌은 자판과 펜이 현격히 다르다”고 말했다.

펜으로 작업하는 소설가를 찾기는 쉽지 않다. 손으로 원고지 수천 장을 채우는 것 자체가 힘겨운 노동일뿐더러 탈고 후 교정과 편집을 거치려면 문서파일로 저장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힘든 길을 고수하는 작가들이 있다.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 등 모두 32권의 대하소설을 무려 5만3000여 장의 원고지에 일일이 써내려간 조정래 씨(68)도 대표적인 육필 소설가다.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긴 ‘원고지 탑’을 볼 때마다 조 씨는 “언제 이걸 내가 다 썼냐”라며 스스로 놀란다. 그는 대하소설 집필 때는 만년필을 썼지만 그 무게 때문에 손에 무리가 오자 최근에는 가벼운 네임펜으로 집필하고, 그보다 더 얇은 마이크로펜으로 교정을 보고 있다. 양복 안쪽에 두 가지 펜을 항상 넣고 다닌다. 그는 “문학이라는 게 농밀한 언어로 써야 하는데 기계(컴퓨터)로 쓰다 보면 속도가 빨라지고 쓸데없이 문장이 길어지게 된다. 죽을 때까지 펜으로 작업을 할 것”이라고 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등을 집필한 김훈 씨(63)도 육필 원고를 고집한다.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나에게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이 없으면 한 줄도 쓰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한자로 찍힌 전용 원고지에 독일제 스테들러 연필로 꾹꾹 눌러쓴다. 독자와의 행사 때는 집필에 사용했던 몽당연필들을 가져와 선물로 주기도 한다. “국산 연필은 흑연 강도가 강해서 금방 뭉그러져 버린다”는 게 외제 연필을 고른 이유다.

드물지만 육필로 작업하는 젊은 작가도 있다. 2001년 등단해 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 장편 ‘귀신의 시대’를 펴낸 손홍규 씨(36)는 펜으로 소설을 쓴다. 대학 시절부터 습작을 했던 그는 “학내 컴퓨터실에서 담배를 피울 수가 없어서 야외에서 쓰다보니 펜 작업이 익숙해졌다”고 한다. 에세이나 기고문을 쓸 때는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소설 집필 때는 꼭 육필을 고수한다. “소설은 제 본업이고 제 노동이다. 온몸으로 느끼고 온갖 정신을 다 쏟아서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대표적인 육필 소설가 가운데 한 명이었던 박범신 씨(65)는 최근 ‘변심’했다. 1973년 등단해 꾸준히 육필로 작업해오다 지난해 출간한 ‘은교’ 집필 때부터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 “작가는 새로운 문명에 대해 풍향계처럼 반응해야 한다”는 게 자판을 두드리게 된 이유다. 하지만 박 씨는 200자 원고지에 작업하기도 한다. 오래된 ‘친구’를 한번에 떠나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작업하기에는 컴퓨터가 편하기는 한데, 조금은 인정이 없는 것 같다. 간혹 피부를 쓰다듬는 마음으로 육필로 원고를 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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