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난 사람]‘공’ 잠시 내려놓고 지금은 ‘돌’ 갖고 제2의 인생 드리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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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축구 국가대표’ 기록의 주인공 김판근 판 글로벌 대표

축구 국가대표 최연소 데뷔 기록을 갖고 있는 김판근 ㈜판 글로벌의 대표이사가 인천 연수구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사무실 근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현역 은퇴 후 축구학교를 운영했던 김 대표는 2014년부터 석재를 공급하고 시공까지 하는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인천=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축구 국가대표 최연소 데뷔 기록을 갖고 있는 김판근 ㈜판 글로벌의 대표이사가 인천 연수구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사무실 근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현역 은퇴 후 축구학교를 운영했던 김 대표는 2014년부터 석재를 공급하고 시공까지 하는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인천=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2개월 전 인터넷에 같은 내용을 다룬 기사 몇 개가 떴다. 한 매체의 제목은 “나 몰라? 축구 천재 김판근”이었다. 전 국가대표 김판근을 사칭하며 대구 일대 화장품가게 등에서 13차례에 걸쳐 수백만 원을 가로챈 50대 남성이 구속됐다는 내용이었다. 김판근이라는 이름은 지난해 4월 아주 오랜만에 언론에 등장했다. ‘한국 축구의 미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승우(18·FC바르셀로나)가 “국가대표 최연소 데뷔 기록을 깨는 게 꿈”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게 발단이었다.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이승우가 목표로 했던 기록의 주인공이 바로 김판근이었다. 1983년 17세 242일의 나이에 A매치에 데뷔한 김판근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시작 늦었어도 남달랐던 축구 재능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의 주역인 김판근 대표의 당시 모습. 이재형 베스트일레븐 이사 제공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의 주역인 김판근 대표의 당시 모습. 이재형 베스트일레븐 이사 제공
40대 이상의 축구팬이라면 1983년 6월을 기억한다. 멕시코에서 열린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현재 명칭은 20세 이하 월드컵)의 감동 때문이다. 한국은 첫 상대 스코틀랜드에 졌지만 개최국 멕시코에 이어 호주, 우루과이를 연파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한국 축구 사상 첫 세계대회 4강 신화였다. 붉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한국 선수들에게 외국 언론은 ‘붉은 악마’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전국을 축구 열풍으로 휩싸이게 만든 태극전사 18명 중에는 ㈜판 글로벌의 김판근 대표이사(50)도 있었다.

“수비수로 뛰었는데 관계자분들이 제 실력을 좋게 봐 주신 것 같아요. 덕분에 성인 대표팀에 발탁됐고 그해 11월 1일에 열린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차 예선 태국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어요. 그게 최연소 A매치 기록으로 남은 거죠.”

김 대표는 전남 해남에서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가 운영하던 식당이 잘돼서 그 시대치곤 집안 형편이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해남에 있는 송지중학교를 다닐 때 차범근 감독님이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모습을 TV를 통해 봤어요. 얼마나 멋있던지…. 축구부가 있는 학교에 가겠다고 마음먹고 부모님을 졸랐습니다. 처음에는 반대하셨죠. 그때만 해도 운동으로 먹고살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었거든요. 결국 허락을 받아내 광주 북성중으로 전학을 갔죠.”

시골에서 동네축구를 했던 아이를 학교 축구부에서 그냥 받아줄 리 없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광주로 가 테스트를 받았다.

“그 학교 선수들은 리프팅(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다루기), 트래핑(날아온 공을 멈추기) 등의 기술이 뛰어났어요. 저야 개인기는 형편없었죠. 그래도 경기에서는 뒤지지 않았어요. 그게 먹혀 합격했던 것 같아요.”

입단하자마자 그는 주전을 꿰찼다. 6개월 만에 전남 대표로 뽑혔다. 3학년 때 전남 대표로 다른 학교 선수들과 함께 소년체전에 출전했다. 맹활약하는 그를 보고 축구 명문 광주 금호고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라고 해서 간 건데 1학년 때는 감독님이 한 경기도 못 뛰게 했어요. 처음에는 잘하는 선배들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했죠. 그런데 교체선수로도 안 끼워 주더군요. ‘선배들보다 잘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훈련하다 허리까지 다쳤어요. ‘에라, 축구 집어치우고 공부해서 대학 가자’는 생각을 했었죠.”

축구부를 나가겠다는 그를 감독은 “내년에는 뛸 수 있다”며 만류했다. 그만두지 않기를 잘했다. 2학년이 되자 그는 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번도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해 2개의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뒤 청소년 대표로도 선발됐다. 이후 다쳤을 때를 빼곤 줄곧 태극마크를 달았다. 1983년부터 1996년까지 A매치 58경기에 출전했다.

두 번의 여행이 인생을 바꾸다

김 대표는 고려대를 졸업한 뒤 1987년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에 입단해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94년에는 LG(현 FC서울)로 팀을 옮겼다. 1997년 정규리그를 마친 그는 호주로 갔다. 이민을 간 대학 선배가 꼭 한번 놀러 오라는 말을 여러 번 했던 터였다.

“1997년 5월에 결혼을 했어요. 절친한 후배인 프로축구 FC서울의 최용수 감독이 아내를 소개해 줬죠. 10월에 호주로 갔는데 그때는 혼자였어요. 아내가 임신 중인 데다 잠깐 다녀올 생각이었거든요.”

놀러 갔다고는 해도 현역 선수였다. 늘 운동기구를 갖고 다녔던 그는 선배에게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선배는 시드니 인근에 있던 마코니라는 축구팀을 소개해줬다. 이탈리아인이 운영하는, 당시 호주에서 가장 큰 팀이었다. 구단 관계자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흔쾌히 허락하며 운동장은 물론이고 피트니스센터까지 쓸 수 있도록 해줬다.

당시만 해도 호주의 축구 수준은 한국보다 한 수 아래였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던 김 대표의 움직임은 그곳 선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그 팀 감독이 제가 훈련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우리 팀은 수비가 불안하다. 당신이 꼭 좀 와주면 좋겠다’며 이적을 제안했습니다. 솔직히 현역 은퇴를 생각하던 시점이라 인생의 전환점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신혼살림 다 남들 주고 아내와 둘이 호주로 가 곧바로 팀에 합류했습니다. 잠깐 놀러간 게 인생을 바꿨죠.”

김 대표는 호주에서의 선수 생활이 아주 즐거웠다고 했다.

“선수들이 덩치는 어마어마하게 큰데 축구 실력은 별로였어요. 마음먹은 대로 축구를 했죠. 팀 성적도 올랐습니다. 덕분에 일간지 1면에도 등장했고 구단 광고도 찍었죠. ‘호주 축구 정말 별거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축구 선진국 영국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인 구단 운영 방식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선진화된 시스템이었어요. 특히 산하 유소년 선수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승부에 대한 압박감 없이 축구를 즐기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 내가 막연히 답답하게 느꼈던 게 이런 점이었구나’ 하고 깨달았죠.”

4년에 걸친 호주에서의 선수 생활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김 대표는 2001년 축구학교를 세웠다. 처음에는 집에서 작은 규모로 운영하다 브리즈번에 그라운드, 도서관, 기숙사까지 갖춘 축구학교를 만들었다. 현지에 있는 존폴칼리지와 계약하고 그 학교 소유의 땅을 임차해 시설을 지었다. 한국 축구의 대들보 기성용(27·스완지시티)도 여기서 꿈을 키웠다.

“성용이 아버지(기영옥 광주시축구협회장)는 고교 선배이자 정말 친한 형이에요.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전남대 선수였던 형에게 지도를 받기도 했죠. 축구학교를 차렸다는 얘기를 듣고 ‘믿고 맡기겠다’며 성용이를 호주로 보낸 거죠.”

기성용은 2001년 초부터 2005년 9월까지 호주에 머물렀다. 2002년 축구 아카데미 ‘판 스포츠’가 브리즈번에 문을 연 뒤에는 존폴칼리지에서 수업을 받으며 운동과 학업을 병행했다. 축구학교는 현지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성과를 거뒀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국내 유소년 축구 여건이 재능 있는 아이들의 유학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를 접은 김 대표는 다른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1997년 호주 여행이 그랬듯 그의 인생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친한 후배와 함께 간 2014년 베트남 여행이었다.

“축구 시키려면 자녀 수준 정확히 알아야”

김판근 대표(오른쪽)와 아들 데니 형준 김. 아들은 호주 축구 청소년 대표다. 김판근 대표 제공
김판근 대표(오른쪽)와 아들 데니 형준 김. 아들은 호주 축구 청소년 대표다. 김판근 대표 제공
“후배가 베트남 채석장에 투자를 하고 있었어요. 볼일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머리나 식힐 겸 동행했죠. 구경이나 해보라고 해서 채석장에 갔는데 현무암을 캐는 광경을 보니 ‘이거다’ 싶더라고요. 곧바로 장비를 투자해 지분을 확보했습니다.”

그는 국내에 돌아온 뒤 ‘판 글로벌’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렸다. 처음에는 베트남 돌만 수입했지만 지금은 중국, 터키의 현지 채석장과도 계약을 맺었다. 기존 건설업체에 납품만 하다 이제는 시공으로도 영역을 넓혀 제주에 18층짜리 호텔을 짓고 있다. 인천 송도신도시와 제주에 사무실을 열었고 베트남, 중국, 대만에도 현지 사무소를 개설했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업은 잘되고 있어요. 축구를 하다 어느 순간 눈이 확 떠진 것처럼 사업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축구학교를 접은 뒤 여러 가지 일을 해본 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선수 시절 ‘그라운드의 여우’로 불렸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영리한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돼서 갖고 있는 재능을 발휘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선수들 지도는 축구학교에서도 많이 해 봤어요. 아들(데니 형준 김·18)도 직접 가르쳤죠. 처음에는 아들이 축구장에 오는 것도 막았어요. 축구를 시키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클럽 활동을 하면서 재미를 붙이더니 초등학교 5학년 때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하더군요. 시작이 늦은 편이라 속성으로 기본기부터 가르쳤죠. 3개월 정도 지나니 또래 선수들과 실력이 비슷해졌고 6개월 지나니 따라잡더군요. 13세부터 연령대별 대표팀을 놓치지 않았어요. 지금은 브리즈번 로어라는 구단의 유소년 팀에 있습니다.”

말대로라면 그는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타고난 셈이다. 그런데 왜 많은 러브콜을 고사하고 지도자로 나서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국내 프로에서 뛸 때 환상이 깨졌어요. 당시 감독들 중에 존경하는 선배들이 많았는데 한 시즌 못했다는 이유로 그냥 잘리더군요. 제게는 우상이었지만 구단에서 보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약직이었던 거죠.”

지도자로서는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축구인이라는 것을 잊은 적이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축구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장학재단 설립 같은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축구학교를 운영할 때도 그랬듯이 재능이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는 생각은 늘 했어요. 구단 운영에 참여해 제가 갖고 있는 축구관을 실현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네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사업으로 성공해야죠. 대기업처럼 대단지 아파트도 짓는 회사로 키우는 게 사업가로서의 꿈입니다.”

최근 국내에는 각종 축구교실이 성행하고 있다. 인구는 줄어도 축구하는 아이들은 늘고 있다. 자녀를 ‘제2의 기성용’으로 키우려는 부모도 늘고 있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축구학교를 운영했던 그에게 ‘축구 부모’를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자녀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 채 ‘국가대표로 키우겠다’며 축구에 다 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좋은 지도자라면 초등학교 선수만 봐도 어떤 재목인지를 압니다. 뒤늦게 기량을 꽃피우는 선수도 있지만 그래도 고교 1학년이면 결정됐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재능이 없다’고 쉽게 얘기하지 않아요. 선수가 많아야 생업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소질이 없는데 축구를 강요하는 것은 자녀의 인생을 망치는 길입니다. 먼저 축구를 즐기게 하세요.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자녀의 수준을 파악한 뒤 ‘자녀와 의논해’ 진로를 결정하세요.”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김판근#축구 국가대표 최연소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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