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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순간]정희선 국과수 前원장과 ‘가수 김성재 변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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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순간]정희선 국과수 前원장과 ‘가수 김성재 변사 사건’

동아일보입력 2013-06-15 03:00수정 2013-06-1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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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약물 정체가 뭘까… 13만종 뒤져 ‘동물마취제’ 밝혀내
“새 원장님 오셨는데 괜히 가면 실례지.” 한사코 안 된다고 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예전 일터’에 잠깐만 들르자는 부탁에. 하지만 거듭된 요구에 결국 굴복(?), 10일 서울 양천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찾은 정희선 전 원장. 직원들 줄 간식거리(빵 200개)까지 잊지 않고 챙겨 간 그녀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20대 중반, 키 180cm의 건장한 체형의 청년이 차가운 부검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일단 조심스럽게 팔부터 살펴봤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내일 아침이면 그가 세상을 떠난 이유를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1995년 11월, 바깥바람이 제법 쌀쌀하다고 느껴질 무렵이었다. 연구소장으로부터 한 청년의 사인(死因)을 밝혀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사회적 관심이 높으니 밤을 새워서라도 답을 찾으라”는 말과 함께였다.

연구실 책벌레여서였을까, 워낙 대중문화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하다는 그를 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신문을 보고서야 프로필을 알게 됐다. 그는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유명 그룹 멤버였다.

청년의 사인 규명은 예상과 달리 쉽지 않았다. 섣부른 자신감과 기대는 곧 소독약 냄새가 밴 무겁고 차가운 공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유명 연예인의 사인은?

오른팔에만 28개의 주삿바늘 자국이 정맥을 따라 쭉 이어져 있었다. 모든 자국이 아주 선명한 게 특이했다. 보통 마약 투약자들은 매일 약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삿바늘 자국마다 선명도가 다르다. 자국이 전부 선명하다는 건 모두가 생긴 지 얼마 안 됐다는 뜻. 얼추 봐도 삐뚤삐뚤한 자국은 주사 놓는 실력이 아마추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사인을 밝히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청년은 약물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위 내용물과 소변, 혈액 등 다른 증거도 충분히 확보한 상황. 속으로 생각했다. ‘어떤 종류의 약물인지만 확인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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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딱 하루 뒤. 눈앞이 캄캄했다. 300종류의 마약 검사를 했지만 일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경찰은 물론이고 언론까지 하루, 아니 한 시간이 멀다하고 난리였다. 워낙 잘나가던 연예인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자 온갖 추측과 의혹이 난무했다. 그런데 몇 번을 다시 검사해도 마찬가지였다. 마약은 아니었다.

이때부터였다.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 잠깐 잠이 들었을 땐 꿈에서도 연구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정희선은 연구소에서 ‘마약 전문가’로 불렸다. 한창 질주하던 그녀가 일에서 멈춰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부담감에 손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때였다. 귓가에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십 년 전 어린 시절에 듣던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힘든 일이 닥치면 먼저 심호흡부터 크게 해라. 그리고 천천히 실타래를 풀면 된다.”

아버지는 말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말씀이 그렇게 또렷이 들린 이유를 그녀는 아직도 모른다. 어쨌든 그 음성은 뇌리에 또렷하게 박혔고, 바로 그 순간 신기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곤 ‘처음으로 돌아가자’란 생각이 들었다.

13만 종의 화합물 관련 자료를 가져다놓고 일일이 차근차근 대조하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바깥세상은 그냥 그러라고 남겨두고 연구에만 몰두했다. 밥 먹는 시간까지 아꼈다.

하늘이 감복해서일까. 일주일쯤 지나 청년의 몸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화합물을 발견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대체 이 화합물이 무엇에 들어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구조식까지 그려가며 확인했더니 결국 한 가지 물질이 남았다. 동물마취제로 사용되던 졸레틸. 본인 또는 누군가가 졸레틸에 그 효능을 강화하는 물질까지 섞어 청년의 몸에 투여했다. 바로 그것이 죽음을 불러왔다.

수많은 젊은이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어넣었던 그룹 ‘듀스(Deux)’ 멤버 김성재의 사인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정희선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자칫 ‘영구미제’로 남을 것 같던 사망 원인을 밝혀낸 여성 연구원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아쉽게도 김성재의 죽음은 사인만 밝혀진 ‘의문사’로 남았다. 하지만 그 사건은 정희선의 직업인생에 커다란 이정표가 됐다. 김성재의 사인 규명은 그녀가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 당시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란 생각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짧은 며칠 동안 겪었던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일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의무감을 새롭게 해 주었다.

욕심도 생겼다. 과학수사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가 되겠다는 욕심. 그녀는 말했다.

“그때 꿈틀대기 시작한 야망, 그리고 훌쩍 커진 마음의 그릇이 최초의 여성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원장, 정희선을 낳았습니다.”

커피 심부름 하는 ‘미스 정’

“3년만 버텨 줘.”

농담조가 아니었다. 1978년 봄, 한 면접관이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직 대학생인 정희선에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대부분의 여성이 결혼 후 바로 직장을 그만두던 시대였다. 게다가 ‘험한 일’을 밥 먹듯이 하는, 마초 느낌을 물씬 풍기는 신생 국과수에 여자라니. 세상모르는 순진한 표정으로 면접장에 온 희선을 보고 면접관이 그렇게 말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데 정희선의 생각은 달랐다. 2년 전 캠퍼스에서 오수창 당시 국과수 소장의 특강을 들은 뒤부터 마음속에 국과수를 품어온 터였다. ‘과학의 힘을 빌려 진실을 캐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그녀는 나중에 원장으로 취임한 뒤 국과수의 슬로건을 ‘진실을 밝히는 과학의 힘’으로 바꿨다.)

이런 포부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출근한 첫날. 선배들은 실험기구 닦는 일을 시켰다. ‘그래, 처음이니 그렇겠지.’ 군말 없이 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이 8개월을 갔다. 내 일은 없고 선배들 일만, 그것도 허드렛일만 도와야 했다.

더 싫었던 건 커피 심부름이었다. 남자 후배가 들어와도 선배들은 그녀에게 커피를 타오라고 했다. 이름 대신 ‘미스 정’이라고 불릴 때가 더 많았다. ‘이 조직이 내가 더 일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혼란스러웠다.

이때 그녀보다 열두 살 많은 ‘그’를 만났다. 그의 첫인상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처음 그녀에게 한 말도 그랬다.

“여기 월급도 적은데 다닐 수 있겠어?”

조금만 잘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실험할 때 장갑을 끼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 취급을 받았다.

한동안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적응이 좀 되자 그의 장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굉장히 꼼꼼했다. 또 한번 시작한 일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끝을 봤다.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하니 업무가 술술 풀렸다. 때때로 그가 조용히 다가와서 무뚝뚝하게 ‘할 만한 일’을 던져줬다. 몸은 더 바빠졌지만 정희선은 처음으로 일에서 보람을 찾게 됐다.

‘그래, 여기에 남자.’ 자연스레 마음속에서 그 남자의 비중이 커져갔다. 그러나 그때는 상상도 못했다. 그가 자신의 운명이란 사실을 말이다.

운명… 그녀의 삶에 들어오다

“저녁이나 먹을래?”

국과수에 들어온 지 14년이 지난 1992년. 정희선이 영국 연수를 마치고 막 복귀했을 때 그 남자가 말했다. 비싼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줬다. 희선은 저녁을 먹는 내내 의아해했다. 그는 끝까지 말이 없었다. 고백을 받은 건 두 번째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그는 “이성으로서 제대로 만나 보자”고 했다.

황당했다. 하늘같이 존경하던 선배가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다니? 적지 않은 나이 차이가 특히 마음에 걸렸다. 이런 그녀의 생각을 읽었을까. 그는 뒤에서 배려만 했다. 부담은 주지 않았다. 그는 1년 넘게 그렇게 기다렸다.

언제부턴가 희선의 마음이 차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나를 이렇게 아는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내 남자로 받아들이자.’

얼마 뒤 남편이 된 그 남자가 바로 유영찬 전 국과수 원장이다. 유영찬, 정희선 부부는 10년 차로 국과수의 수장이 됐다.

이 부부에겐 공통점이 있다. 일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를 푸는 해소법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부부는 새로운 일을 시작함으로써 이전 일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잊는다. 덕분에 국과수 역사에 손꼽을 만한 일벌레를 말할 때 부부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정희선은 “나사가 좀 느슨해질 때면 서로를 보고 경쟁하듯 자극을 받았다”며 웃었다.

국과수에는 매일 부검을 해야 할 시신이 전달된다. 부부는 부검을 바라보는 시선도 비슷하다. 부검이란 죽은 자의 존엄을 찾아주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시신과 대면할 때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다. 죽은 자와의 대화가 가능할까. 정희선이 말했다.

“우선 억울하게 죽은 이의 육체를 신성하게 여겨야죠. 그리고 망자(亡者)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됩니다.”

부부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있다. 고등학생 딸은 최근 법의학에 관심이 많아졌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딸이 부부의 뒤를 이어 국과수에 가겠다면? 정희선이 활짝 웃었다. “보통 과학자는 연구에 몰두하고 결과가 나오면 그만이잖아요. 국과수 일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공익을 얻고 정의를 구현해요. 게다가 퇴직하면 연금까지 받잖아요. 말릴 이유가 없죠.”

지난해 7월 국과수에서의 마지막 날. 오전에 퇴임식을 하고 직원들과 점심 식사를 한 정희선은 일찍 집에 왔다. 어색했다. 시간이 멈춰선 듯한 느낌이었다. 이후 국과수, 그리고 직원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했다. 고향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퇴임 후 한동안 국과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떠난 사람은 완전히 떠나야죠. 그래야 새로 오신 원장님이 빨리 자리를 잡죠. 그게 예의죠. 직원들이 보고 싶어도 꾹 참았어요.”

정희선은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을 좋아하고, 아직 초콜릿과 만화를 좋아하는 낭만주의자지만 동시에 칼 같은 원칙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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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했다. 앞을 가로막은 장벽은 거대했다. 기존의 장비와 방식으론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았다. 꼭 선진 과학수사 기법을 배워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때 영국이란 나라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영국의 법과학은 세계 정상급이었다.

1990년, 마약 전문가로 명성을 쌓아가던 정희선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바쁜 업무를 잠시 놓아두고 영국에 가기로 했다.

당시엔 공무원이 해외유학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비용 문제도 큰 걸림돌이었다. 유학 얘기를 꺼내기도 힘든데 비용까지 대 달라는 건 ‘그만두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그녀의 눈에 영국 외교부 장학금이 들어왔다. 유일한 희망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찾아간 영국 대사관에서 푸른 눈의 영국인 직원을 만났다. 워릭 모리스 1등 서기관이었다. 장학생 면접을 맡은 모리스 서기관은 처음 만난 정희선에게서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다. 과학수사 불모지로 여겼던 한국의 여성 전문가가 내보이는 당돌한 자신감과 자부심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정희선이 장학금 지급 대상이 된 건 물론이었다. 모리스 서기관은 자신이 먼저 나서 국과수를 설득해 주기도 했다. 정희선의 영국 유학을 허락해 달라고 말이다.

이렇게 처음 인연을 맺은 모리스 서기관은 이듬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2003년 주한 영국대사로 부임하면서 다시 정희선을 만나게 됐다.

모리스 대사는 어느덧 국과수의 기둥으로 성장한 정희선을 보고 “내가 사람 보는 안목이 있다”며 기뻐했다. 두 사람은 지금도 둘도 없는 친구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두 사람은 법과학자 교류 프로그램을 만들어 7년 동안 운영했다. 수사기법 공유 프로그램 등의 법과학 교류는 지금도 활발하다.

정희선은 최근 런던에 갔다. 일정이 빠듯했지만 잊지 않고 모리스 씨를 방문했다. 둘 다 은퇴한 뒤 가진 첫 만남이었다. 정희선은 “오랜 친구를 만나니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마음이 느껴지더라”고 말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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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선#국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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