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연설 절정 때 日軍 조준사격… 1만3000여 군중 분노 폭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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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38화>경남 합천

경상남도 합천에 깃든 3·1만세운동의 숨결을 찾으러 떠나볼까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3부 1권엔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짝쇠가 경남 진주에서 8개월 동안 옥살이하고 풀려난 상황을 소개하면서 3·1만세운동을 다룬다.

“3·1운동은 경상남도에서 합천 방면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었다. …(중략)…3월 23일 합천군 삼가에서 체포된 주모자를 탈취하기 위해 만 명이 넘는 군중이 시위에 돌입했고 면소에는 방화, 주재소 우편소를 때려 부쉈는데 바로 이 시위 때문에 짝쇠가 붙잡혀간 것이다.”

소설에 소개된 것처럼 합천의 3·1만세시위는 당시 전국에서 펼쳐진 만세운동 가운데서도 두드러졌다. 무엇보다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와 ‘경남 합천의 3·1운동’(이정은) 등에 따르면 3월 23일 삼가면 만세시위 때 참가자는 1만3000여 명에 달했다. 당시 시위대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일제는 1만여 명으로 낮춰 잡았지만 상하이 임시정부의 ‘한일관계사료집’과 재일 사학자 강덕상의 ‘현대사자료’는 3만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관순이 이끌었던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의 만세시위 참가자가 3000명 정도다. 더구나 도시가 아니라 농촌지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규모다.

○ 합천 만세시위의 도화선, 삼가면 장터 시위

지난해 3월 20일 합천군 합천읍에서 펼쳐진 합천 3·1운동 재현행사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합천군 제공
지난해 3월 20일 합천군 합천읍에서 펼쳐진 합천 3·1운동 재현행사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합천군 제공
조용하던 합천은 3·1운동 당시 서울에 있던 정현상과 이원영이 독립선언서를 갖고 고향 땅을 밟으면서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때가 3월 중순이었다. 상백면의 정현상은 큰형에게, 백산면의 이원영은 친구에게 각각 서울 소식을 알리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지역별로 하던 만세시위 준비는 정연표가 나서면서 일원화됐다.

거사일은 삼가면 장날(18일)로, 거사 장소는 삼가면 장터로 정해졌다. 작은 태극기는 각자 준비하기로 했다. 만석꾼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서재를 내줬고 나무활자를 이용해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냈다.

마침내 거사일이 되자 장꾼을 가장한 시위대가 장터로 몰려들었다. 오후 5시경 그 수가 300∼400명으로 불어났을 때 정연표가 나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만세 소리가 장터 곳곳에 울려 퍼졌다. 시위대가 주재소(일제강점기 경찰의 말단 조직)까지 포위하자 일제 경찰은 겁에 질렸다. 합천경찰서 병력과 일본인 재향군인들까지 출동하고 오후 8시가 돼서야 강제 해산작업은 끝이 났다.

주동자로 체포된 정연표는 취조하던 일경에게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 문화를 배워갔거늘 어찌하여 그 은혜를 망각하고 침탐하느냐. 조국을 위하여 의거함이니 죽음인들 무엇이 두렵겠느냐”고 질책한 뒤 침묵으로 일관했다.


○ 유림의 고장이 영남 만세운동의 중심지로


경남 합천군 삼가면 삼가시장 인근에 위치한 삼가 장터 만세시위 기념탑. 합천=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경남 합천군 삼가면 삼가시장 인근에 위치한 삼가 장터 만세시위 기념탑. 합천=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삼가면 장터 시위를 계기로 합천에는 반일 분위기가 고조됐다. 합천은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 선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유림의 고장’ 같은 곳이다. 유림 지도층과 유지들이 만세시위에 대대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강력한 조직 동원력을 갖춘다.

실제로 유림은 3·1운동의 총주도자로서 배후에서 지휘하고, 시위 준비 과정에서 지역을 분담해 주민을 동원하고, 인근 면과 연대해 연합 시위를 전개한 특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합천지역 만세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이정은, ‘3·1독립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게다가 당시 합천은 종족마을(117곳)이 전국 162개 군 가운데 17번째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대성(大姓) 종중이 움직이면 많은 사람이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장이 서는 곳마다 만세시위가 펼쳐졌다. 19, 20, 22일에 대양면민들이 주도해 합천읍에서 시위가 펼쳐졌고 20일엔 대병면 창리, 21일엔 초계면 초계리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합천의 첫 만세운동이었던 삼가면 장터 시위 때 300∼400명에 머물렀던 시위대 수는 3000∼4000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 무력 진압에 공세적 시위로 맞서다

규모만 커진 게 아니었다. 시위 양상도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는 수준에서 탈피해 구금된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면 주재소를 부쉈다. 통신망도 망가뜨렸다.

20일 합천읍 시위는 죽음도 불사할 것을 맹세한 12명의 결사대가 주도했다. 결사대원 김영기는 읍내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나라 잃은 백성은 사람 아닌 닭이나 개와 같다. 조국 독립을 위해 최후의 1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자”며 시위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일경이 합천경찰서로 몰려든 시위대를 향해 공포탄을 발사하자 결사대원 추용만은 태극기를 단 대나무 장대로 일본인 서장과 순사들의 머리를 때린 뒤 경찰서 안으로 돌진하다 총탄을 맞고 숨졌다. 이 시위에서 김영기 등 4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했다.

같은 날 대병면 창리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펼쳐졌다. 장날(20일)을 맞아 오후 1시경쯤 4000여 명에 달하는 인파가 장터에 모였다. 만세를 외친 시위대는 창리 주재소로 몰려가 에워쌌다. 선두에 섰던 시위대원 이병추가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일경이 총을 겨눴다. 이에 이병추가 가슴을 풀어 헤치고 다가가면서 “자! 쏴 봐라!”라고 외쳤고 그 순간 순사 부장이 총을 격발했다. 총알이 이병추의 귓가를 관통하면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분노가 폭발한 시위대는 순사 부장과 일경을 때려눕힌 뒤 주재소 가구 등을 부수고 문서들을 불태웠다. 또 주재소에서 100m 떨어진 면사무소도 찾아가 내부를 훼손하고 문서들을 소각했다.

이튿날인 21일 초계리에선 300명의 별동대가 시위를 주도했다. 4000여 명의 시위대가 초계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는 동안 별동대는 우편소를 습격해 인입선을 끊고 전화기를 망가뜨렸다. 일본군과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주재소 유리창을 깨고 공포탄을 발사한 일제 경찰 2명을 때려눕혔다. 초계리에 살던 일본인 46명은 시위대가 해산된 뒤에도 겁에 질린 나머지 합천읍으로 피신했다.


○ 연합 통해 시위대 덩치를 키우다


합천 만세시위는 상백 백산 가회 삼백면 등의 여러 유지들이 주민들의 동참을 독려하면서 연합 시위로 발전했다. 각 지역 대표들의 비밀회합을 통해 거사일은 23일로 정해졌다. 집결 장소는 삼가면 장터의 정금당 앞 광장이었다.

거사 당일 이른 아침 백산면 주민 3000여 명이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부른 뒤 면사무소를 불태웠다. 상백면 주민들과 합세해 삼가면으로 향하면서 전신주 2개를 쓰러뜨리고 전선을 절단했다.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가회면 주민들도 농악을 울리며 삼가면으로 향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일제는 군경을 삼가면 관공서 곳곳에 배치했지만 시위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금당 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모인 시위대는 1만3000여 명을 헤아렸다.

시위는 일제에 대한 성토대회가 됐다. 김전의 정방철 김달희가 차례로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고 민족독립 쟁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연설이 끝날 때마다 북과 징소리가 울렸고 독립만세의 함성이 지축을 흔들었다.(‘독립운동사’) 마지막 연사인 임종봉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높은 계단 위에 올라가 나라 없는 노예의 서러움을 호소했다. 이때 일제 군경은 강연장 주변 포위 작업을 마쳤다.

연설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제 군경은 임종봉을 조준 사격했고 넓적다리에 총탄을 맞은 임종봉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목격한 군중이 달려들자 일제 군경은 주재소로 달아났다. 그들을 쫓아 곤봉 낫 호미 등을 들고 주재소와 우편소로 몰려든 시위대에 일제는 무차별 사격을 실시했다. 현장에서 13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부상했다.(‘독립운동사’)

19일 기자와 함께 옛 주재소와 우편소 자리를 둘러본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 조찬용 회장은 “일제는 사망 5명, 부상 20명이라고 당시 시위대 사상자 수를 줄여 보고했지만 순국자가 42명, 중상 100여 명이라는 기록들이 있다”며 “3·23 삼가 시위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크고 격렬했던 만세운동 중 하나”라고 말했다.

▼ ‘독립선언서 원정대’ 3개팀 파견… 해인사, 영남 만세시위 중심에 서다 ▼

3명이 1개팀… 지역시위 적극 가담
일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합류… “호국불교 정신 자부심 작용한듯”


1919년 3월 말 해인사 학생과 승려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던 해인사 일주문. 해인사 학생들은 여러 지역으로 파견돼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합천=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1919년 3월 말 해인사 학생과 승려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던 해인사 일주문. 해인사 학생들은 여러 지역으로 파견돼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합천=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전국을 휩쓴 3·1만세운동의 거센 바람은 합천 해인사를 비켜 가지 않았다.

일제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전국 3대 사찰 중 하나인 해인사를 주시했다. 이례적으로 경찰 주재소를 해인사에 설치하고 경비전화도 가설했을 정도다. 대구와 해인사를 잇는 도로도 확장했다. 팔만대장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해인사 경내에 있는 보통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려는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해인사 학생과 승려 300여 명은 친일 성향의 주지 이회광에게 반감을 품고 기회가 오면 언제든지 구국의 길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이용락, ‘삼일운동실록’)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서 유학 중인 학생 등을 통해 해인사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됐다. 학생 강재호와 송복만은 200여 리 떨어진 대구까지 걸어가 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 3만여 장을 사왔고, 밀실에서 독립선언서 1만여 장을 등사했다.

그 사이 학생 대표 30명은 팔만대장경각 뒷산에서 비밀회합을 갖고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했다. 지역별로 나눠 활동하기로 하고 3명씩을 1개 대(隊)로 묶어 3개 대를 조직했다.(‘독립운동사’) 누가 어느 지역을 맡아 떠났는지를 총책 이외에는 알 수 없도록 극비에 부쳤다. 3개 대가 독립선언서를 갖고 △경주 양산 부산 김해 △합천 의령 진주 하동 △거창 안의 함양 산청 등으로 떠났다. 다른 학생들도 각자 연고가 있는 곳을 찾아가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학생이 시위 과정에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강재호 송복만 등 10여 명은 훗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독립군이 됐다. 일부는 불교 비밀결사 ‘만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다.

나머지 학생은 사찰 밖으로 나와 만세를 불렀다. 해인사 입구의 일주문(홍하문)에선 3월 31일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학생 200여 명은 오전 11시 홍하문 밖에서 1차로 독립만세를 외쳤고, 그날 오후 11시 군중이 해인사 앞 도로에서 만세시위를 벌이자 다시 합세해 시위를 이끌었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3개 팀을 파견함으로써 경상도 일대 만세시위의 중심에 서겠다는 대담성을 보인 점은 다른 사찰에선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라며 “팔만대장경으로 상징되는 호국불교 정신에 대한 자부심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같은 대학 최화정 박사는 27일 열리는 불교계 3·1운동 학술 세미나에서 ‘해인사의 3·1운동’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합천=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3·1운동#경남 합천#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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