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주성원]‘새 박사’ 구본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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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호(號)가 화담(和談)입니다. 조선시대 학자 화담(花潭) 서경덕 선생과 한글로는 호가 같아요. 참 훌륭하신 분이고 몸가짐도 바르셨던 분이죠…. 그런데 같은 화담이라도 한자가 다르니까 저는 그렇게 할 자신은 없습니다. 허허.”

20일 타계한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자신의 아호(雅號)를 딴 곤지암의 ‘화담숲’ 이야기가 나오면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이렇게 말하곤 했다.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친 서경덕처럼 행동할 자신은 없다는 유머였다.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이런 소탈한 면모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까지 쉽게 매료됐다.

▷구 회장은 소탈하고 유머를 즐기면서도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절대 결례하는 법이 없었다. 유명 중식 셰프 유방녕 씨는 ‘매너가 좋고 존경할 만한 손님’으로 구 회장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흔히 골프장에서는 플레이어들끼리 소액의 내기를 하기도 하지만 LG그룹의 곤지암 골프장에서는 ‘현금이 오가는 내기 골프’는 금지한다. 구 회장은 “골프장에서 현금을 주고받는 것은 졸부들이나 하는 짓 같아 보기 나쁘다”며 정색을 했다.

▷구 회장은 ‘새 박사’로도 유명하다. 여의도 트윈타워 30층 집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해놓고 수시로 한강 밤섬의 야생 조류를 관찰했다. 1996년 천연기념물 흰꼬리수리가 물고기를 낚아채는 장면을 처음 발견할 만큼 고인의 탐조(探鳥)는 프로 수준이었다. 2000년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LG상록재단에서 조류도감 ‘한국의 새’를 출간했다. 천연기념물 323호 황조롱이가 트윈타워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알자 사옥 전체에 특별 보호령을 내리기도 했다.

▷구 회장의 장례는 “나 때문에 번거로운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비공개로 조용한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일부 재벌가 총수, 자제들이 빗나간 행태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 와중이어서 예의 바르고 소탈했던,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재벌 3세’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을 깨뜨린 구 회장의 퇴장이 더더욱 아쉽다.
 
주성원 논설위원 swon@donga.com
#구본무 lg그룹 회장#화담숲#새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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