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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식 전문기자의 스포츠&]정부가 하면 로맨스! 선수가 하면 불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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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식 전문기자의 스포츠&]정부가 하면 로맨스! 선수가 하면 불륜?

안영식 전문기자 입력 2018-01-17 03:00수정 2018-01-1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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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여자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Ⅱ 남북대결 모습. 한국이 3-0으로 이겼다.
안영식 전문기자
‘처음이니까/트랙조차 없어서 아스팔트만 달렸다/상처투성이가 되도록/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내가 멈추면 대한민국에 처음은 오지 않으니까.’

2014 소치 겨울올림픽에 대한민국 최초 여자 루지 국가대표로 출전한 성은령(26)의 국내 통신사 CF 내레이션이다. 30초짜리 영상이지만 그 뭉클함은 1시간 30분짜리 걸작 스포츠 영화 못지않다. 그는 첫 해외 훈련 때 처음으로 얼음 트랙을 슬라이딩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안전벨트 없이 롤러코스터에 탄 듯 온몸이 덜덜 떨렸다. ‘트랙 밖으로 튕겨져 나가면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루지는 3대 썰매 종목(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 중 올림픽에서 유일하게 사망자가 발생한 종목이다. 최고 시속 140km를 넘나들어 가장 빠르고 위험하다. 죽음의 공포,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떨쳐내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은 ‘최초’와 ‘국가대표’라는 자부심과 책임감 때문이다.


이렇듯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전 세계 올림피안들이 출전하는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이 다음 달 9일 17일간의 열전에 들어간다. 그 한 달 뒤인 3월 9일에는 겨울패럴림픽이 개막한다. 지구촌 최대 겨울스포츠 제전이 연출할 환희와 감동에 벌써부터 가슴 설렌다.

그런데 북한 참가 결정 이후 주객(主客)이 전도된 모양새다. 국내외 출전 선수와 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는 관계자들, 삼수 끝에 꿈을 이룬 강원지역 등이 받아야 할 관심을 북한 관련 이슈에 빼앗기고 있다.

급기야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이라는 ‘뜨거운 감자’가 튀어나왔다. 개막이 한 달도 안 남은 상황에서 종목의 특성을 무시한 채 단일팀을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처구니없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헌장 27조 6항에는 ‘국가올림픽위원회(NOC)는 정치, 종교, 경제적 압력을 비롯한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율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남북 단일팀을 원하는 정부의 요구에 대한체육회와 대한아이스하키협회는 울며 겨자 먹기로 끌려가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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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C 헌장 50조 3항에서는 모든 올림픽 관련 시설, 지역 내에서는 어떠한 정치, 종교, 상업적 메시지 전달도 금지하고 있고 이에 단호한 조치를 취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육상 남자 200m 시상식에서 ‘검은 장갑 세리머니’를 펼친 미국 흑인선수 토미 스미스, 존 카를로스의 금, 은메달 박탈과 선수자격 정지다. 두 선수는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의미로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질 때 고개를 푹 숙인 채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IOC는 이를 정치적 행위로 간주했다. 정부와 IOC가 하면 로맨스, 선수가 하면 불륜이란 말인가.

이번 올림픽에 과도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해, 국민들이 올림픽에 거는 기대를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남북 단일팀 출전=평창 올림픽 성공’이라는 도그마는 금물이다. 이전에도 국제스포츠 대회에 남북 단일팀이 출전하고 공동 입장한 적도 있다. 하지만 요란한 이벤트에 그쳤을 뿐이다. 남북 관계 진전은 없었다.

실질적인 문제점을 짚어보자.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 평창 올림픽 성공에 과연 도움이 될까. 글쎄다. 아이스하키는 ‘빙판 위의 축구’다. 팀워크가 생명이다. 손발 맞출 기간이 턱없이 부족한 단일팀은 국제적 망신을 당할 것이 뻔하다. 단일팀을 이끌 세라 머리 한국대표팀 감독(30·캐나다)이 팀 전술상 북한 선수 활용을 기피한다면 남북관계는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정부가 남북 단일팀을 고집한다면, 2017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참석차 방한해 “정치가 스포츠 위에 있다”고 말한 장웅 북한 IOC 위원의 입장과 궤를 같이한다는 뜻인가.

남북 단일팀 성사 여부는 20일 스위스 로잔에서 IOC 주재로 열리는 ‘평창 회의’에서 결정될 듯하다. 만약 승인된다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번 평창 올림픽에 올인해 온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선수들에게는 날벼락이다.

남북 단일팀 관련 기사의 댓글에 담긴 여론은 분노를 넘어 격앙 수준이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에도 ‘반대’가 압도적이다. 그토록 내세우던 소통은 실종됐다. 아니다 싶으면 당장이라도 패를 거둬들이는 게 진정한 용기다.
 
안영식 전문기자 ysahn@donga.com
 


#국제올림픽위원회#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평창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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