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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정진석]언론자유 수호-잡지 저널리즘 새 지평 연 ‘민족의 公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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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정진석]언론자유 수호-잡지 저널리즘 새 지평 연 ‘민족의 公器’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입력 2017-12-16 03:00수정 2017-12-16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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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700호/언론사적 의미]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신동아 2007년 1∼12월호. 2000년대 신동아는 실용적인 경제·생활 기사가 많아졌다. 조영철 기자 korea@donga.com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1931년 11월에 창간된 신동아가 지령 700호(2018년 1월호·12월 17일 발행)를 발행한다. 신동아는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여파로 폐간됐다 28년의 세월이 흐른 1964년 9월 복간돼 오늘에 이르면서 잡지 저널리즘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한국 잡지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잡지를 발행하려면 세 가지 어려움(삼난·三難)을 극복해야 했다. 원고난, 경영난, 검열난이다. 신동아는 신문사의 풍부한 인력, 취재망, 광고 선전력을 활용하여 잡지계의 판도를 신문사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신문사가 발행하는 잡지라는 의미의 이른바 ‘신문잡지’로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잡지문화를 선도했다. 편집진은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해외 유학 경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광복 후 학자, 문인, 교육자로 크게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주요섭(소설가·시인 겸 언론인 주요한의 동생·중국과 미국 유학), 고형곤(철학자·연희전문, 서울대 철학과 교수·학술원 회원·전북대 총장), 이은상(시조시인·전남대 재단 이사장·예술원 회원), 최승만(일본과 미국 유학·연희대 교수·제주도지사·제주대 학장·이화여대 부총장·인하공대 학장), 박승호(창덕여중 교장), 변영로(미국 유학·대한공론사 이사장으로 Korean Republic 발행인·한국펜클럽 초대 회장), 황신덕(중앙여자중고교 교장), 이무영(소설가·문 총 최고위원)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신동아는 1936년 9월호 발행 후 폐간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가 일장기 말소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으면서 최후의 운명을 맞았다. 동아일보는 277일(1936년 8월 29일∼1937년 6월 1일) 만에 최장기 정간이 해제됐지만 신동아와 함께 동아일보가 발행하던 신가정(1933년 창간·현 여성동아)은 더 이상 발행될 수 없었다.

1964년 9월 신동아는 다시 살아났다. 정치적인 파동이 많았던 무렵이었다.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여 제3공화국이 출범했지만 이듬해 6월 3일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6·3한일회담반대운동) 전국의 대학은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언론윤리위원회 파동으로 언론계가 반대투쟁을 벌이던 무렵이었다. 신동아는 19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신문사들이 잡지를 다투어 발행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신동아 복간과 나란히 1964년 9월 27일 한국일보는 주간한국을 창간했는데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의 월간과 주간지 창간은 다른 일간신문의 월간 및 주간지 발행을 자극했고 1960년대 중반 이후 주간지 붐이 일게 했다.

일제 치하의 신동아 폐간이 제11회 베를린 올림픽과 관계가 있었는데, 복간되던 1964년에도 도쿄에서 개최될 제18회 올림픽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일간지는 용지 부족으로 지면 감축을 거듭하여 주 32면(월 화 목 금요일은 4면, 수 토요일은 8면 발행)의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 오늘날 하루 치에도 못 미치는 지면이다. 하지만 잡지는 긴 글을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가졌으며 그것을 지루하지 않게 엮어낼 수 있는 필자도 많았다. 일제 때에 비하면 독자의 수준도 높았다. 사회적 여건이 훨씬 좋았던 것이다. 복간 첫 호는 468면에 값은 80원. 당시 신문 한 달 치 구독료는 100원이었다.

신동아 주간 천관우는 후에 복간 당시의 편집 방침을 논설 스타일의 정론잡지가 아니라 주장과 의견을 담으면서도 부드럽게 만들어 독자들이 친근감을 갖도록 하겠다는 방향이었다고 회고했다. 신동아는 종합잡지였지만 동시에 학술지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매년 신년호 별책부록으로 발행한 자료집은 중요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는 기획이었다. 근세사와 관련되는 자료를 비롯해 철학, 사상, 예술 등의 문제를 독자들이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했는데, 분야별 학술지가 발전·정착되면서 2000년 이후에는 실용적인 부록으로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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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도 뒤따랐다. 1968년의 ‘신동아 필화’는 동아일보의 발행인이 바뀌고 중진 언론인들이 신문사를 떠나야 했던 후유증으로 언론계에 준 충격이 컸던 사건이다. 동아일보 김진배(정치부), 박창래(경제부) 두 기자가 공동 집필해 신동아 12월호에 게재한 ‘차관(借款)’이란 심층 기사는 원고지 250장의 긴 분량이었다. 동아일보는 권력의 압박을 받은 끝에 관련 간부진의 전면적인 인사개편을 피할 수 없었다. 천관우(동아일보 주필), 홍승면(신동아 주간 겸 논설위원), 손세일(신동아 부장) 등 3명의 해임조치는 동아일보만이 아니라 전체 언론이 새로운 시련기에 접어들었다는 엄중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신동아 필화사건 이후에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974년 말에서 1975년 초에 걸치는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태 때 신동아도 광고해약을 겪었으나 신동아는 굴하지 않고 권력의 탄압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많은 시민, 교수, 필자들이 격려광고를 게재하여 잡지의 권위를 드높였다. 이 와중에 오히려 신동아의 구독자는 늘어났다. 1987년에는 이후락 증언을 실은 10월호가 최대 발행부수 40만 부를 돌파한 일도 있었다.

5공화국 이전의 정치권력 핵심부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관한 심층보도는 잡지 저널리즘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잡지 저널리즘도 일간지 못지않은 대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월간지가 국내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화제와 문제점을 던져준 경우도 있었다. 이후락 증언이 그러한 예였다.

700여 명의 통일교 신도가 신동아 편집실을 난입한 사건은 ‘대해부 통일교 왕국’(2006년 8월호) 기사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른바 ‘최태민 보고서’(2007년 6, 7월호)의 출처 확인을 위해 검찰이 두 차례나 동아일보 전산실 서버 압수수색을 시도하였으나 출판국과 편집국 기자들이 수일간 연좌저지로 이를 막아낸 사건도 있었다. 두 사건을 비롯해 신동아는 언론자유를 수호하고 잡지 저널리즘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신동아가 이끌어 온 잡지문화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전파매체와 인터넷의 발달에 따른 독자들의 구독 형태 변화 등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동아는 불어닥치는 도전을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부디 신동아가 일제강점기의 창간정신과 그간의 전통을 계승해 새로운 잡지문화를 창조하고 민족의 진로를 제시하며 문화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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