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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문, 찌릿하게 공명하되 함부로 섞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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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문, 찌릿하게 공명하되 함부로 섞이지 마라”

권재현 기자 입력 2018-12-08 11:00수정 2018-12-0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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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의 심중일언]‘떨림과 울림’의 저자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조영철 기자]

“나, 떨고 있니?”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최민수가 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주 삼라만상에 모두 적용된다는 걸 배웠다.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의 책 ‘떨림과 울림’을 읽고서다.

우주 만물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원자는 모두 118개로, 하나같이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도는 원운동을 한다. 그런데 물리학에선 그 원운동을 단순조화진동의 약자로서 ‘단진동’이라 부른다고 한다. 단진동은 수많은 진동 가운데 가장 단순한 진동을 말한다. 진동은 떤다는 거다. 따라서 우주 삼라만상은 모두 떨고 있다.

그럼 책 제목 속 ‘울림’은 뭘까. 만물의 떨림에 대한 인간적 감응이다. 인간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대한 인간적 공명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을 대상으로 인간이 발휘하는 상상력도 울림이다. 떨림이 물리학이라면, 울림은 인문학이다. 김 교수는 자신이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설렘이 다른 이들에게 떨림으로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떨림과 울림’을 썼다며 울림은 독자의 몫이라고도 했다.

그 울림이 제법 크다. 이번 책을 출간한 도서출판 동아시아에 따르면 출간 한 달 만에 4쇄를 찍으며 1만 부를 돌파했다. 각종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과학 분야 1위는 물론, 종합순위 20위권에 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경우 12월 5일 현재 14위에 올라 있다. 그의 첫 대중과학서로 2016년 역시 동아시아에서 펴낸 ‘김상욱의 과학공부’의 판매량이 2만 부였다.

12월 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레스토랑 충정각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그의 표현처럼 기괴한 양자역학을 다룬 책으로는 이례적으로 돌풍을 몰고 온 이유를 먼저 물었다. 현재 방송 중인 케이블TV방송 tvN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3’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라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겸손의 말이 돌아왔다.

어려운 과학을 읽기 쉽게 쓰는 과학저술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칼 세이건이다. 한국엔 누가 있을까. 고(故) 조경철 박사를 필두로 최재천, 정재승, 이정모, 서민 등이 떠올랐다. 그중에 양자물리학자는 없다. 조 박사는 천체물리학을 전공했고, 정 교수는 카오스이론을 전공하다 현재는 뇌과학을 연구 중이다. 나머지 저술가는 생물학 전공자들이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려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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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 경우 생물학자로는 리처드 도킨스가 가장 유명할 듯하고 물리학자로는 칼 세이건이 독보적이긴 하지만, 판매량만 놓고 보면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가 세이건의 ‘코스모스’보다 더 많이 팔렸습니다. 그만큼 우주 시원에 관심이 많아 물리학 전공 저자들이 유리하지 않나 싶습니다. 굳이 양자물리학자로 범위를 좁히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렇게 대중적인 필자는 없지 않나요.”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의 리처드 파인만이 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김 교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어휴, 파인만은 양자물리학뿐 아니라 20세기 물리학 전 분야를 아우른 천재인 걸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 파인만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수포자’(수학 포기자)보다 더 많다는 ‘양포자’(양자물리학 포기자)들이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며 ‘쉴드’를 치고 나올 때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다. 아무도 이해 못 하는 것을 왜 내가 배워야 하느냐는 반문이다.

그런 양포자들을 계몽·각성케 하려는 취지에서 이 말을 꺼내자 김 교수는 정색하며 말했다. “양자역학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귀를 의심했다. 아니, 뭐라고요?

“기자님은 지구가 돈다는 것을 이해하세요? 지구가 공전한다는 것은요?”

소크라테스가 상대의 무지를 일깨울 때 사용한 산파술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상대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문답법이다. 여기에 정답을 제시하려고 말려들기 시작하면 스스로의 무지를 고백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길만 있을 뿐이다. 말려들지 않으려면 반문을 던지거나 질문자의 의도를 읽고 선수를 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머뭇거리다 답했다. “음~ 이해한다기보다 납득하게 됐다, 그걸 받아들이게 됐다가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김 교수의 눈에 아쉬움이 스치는 게 보였다. 사냥감을 눈앞에서 놓친 맹수의 표정이었다. 살짝 쓴웃음을 짓던 그는 양자역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와 양자역학을 인정하려 하지 않던 아인슈타인의 논쟁으로 화제를 돌렸다.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 아인슈타인에게 보어가 이런 질문을 던져요. 도대체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두 사람이 도달한 결론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 및 경험과 새로운 지식이 정합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런 정의를 가진 이해의 범주에는 양자역학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양자역학의 상황과 용어는 인간 언어에 존재하지 않아요. 하나의 입자가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한다는 개념은 우리 언어에 없습니다. 복잡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존 지식이나 경험과 정합적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은 머릿속 상상을 통해 그려보는 것이 가능한 반면, 하나의 컵이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한다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잖아요.”

그래서 “물리학자들도 양자역학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여서 사용한다”고 한다. 논리적으론 이해가 안 되지만 수학공식화해 적용하면 딱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받아들인다는 설명이다.

보어는 아인슈타인과 대화를 통해 “문제는 우주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정확히는 인간의 잘못도 아니다. 인간 두뇌는 원자처럼 아주 작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아다니는 파리가 상대성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분방정식을 풀지 못한다고 뭐라 할 수 없다는 이치와 같다는 것이다.

‘양자역학 실용주의’

138억 년 전 빅뱅이 일어나 시공간이 생겨나고 다시 38만 년이 지나 수소와 헬륨 같은 원자가 생기면서 빛이 탄생한다. 그와 더불어 만물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사진 제공 · 동아시아]
양자역학 원리를 ‘이해’할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파생된 무수한 지식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일찍이 데모크리토스가 말했던 만물은 원자로 구성돼 있다는 가설이 과학적으로 입증됨에 따라 물질에 대한 모든 답은 양자역학으로 수렴됐고, 20세기 과학혁명이 벌어졌다. 그 물질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모든 것은 원자의 집합이라는 양자역학의 세계에 눈을 뜨자마자 바로 의미심장한 제안이 나옵니다. 1926년 파동방정식을 제창해 행렬역학을 수립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양자역학을 확립했다고 평가받는 에르빈 슈뢰딩거는 1944년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발표합니다. 생명체에는 물질로 된 유전 정보가 있을 테니 그 원자구조를 밝혀내면 생명의 신비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영감에 힘입어 분자생물학이 출현하고 결국 DNA도 발견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원자 레벨로 이해하게 되면서 엄청난 혁명이 벌어집니다. 원자를 이루는 전자를 떼서 뭔가를 하는 게 전자공학이죠. 원자를 재조합하면 새로운 물질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찢어지지 않고 질기지만 영원히 변형되지 않는 천을 만들 수 있을까 해서 나온 게 나일론이고, 투명한데 전기를 통하게 하는 물질이 가능할까 해서 만든 게 휴대전화 액정에 쓰이는 인듐주석산화물(ITO) 필름이에요. 이처럼 양자역학의 기괴함을 이해 못 한다 해도 그것을 활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양자역학에 대한 실용주의적 접근이라 할 이런 설명을 들으면서 ‘떨림과 울림’이 쉽게 다가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떨림과 울림’은 물리학적 발견(떨림)을 인문학적 글쓰기(울림)로 펼쳐낸다. 떨림의 영역은 넓다. 그가 기괴하다고 표현한 양자역학의 세계뿐 아니라 뉴턴의 고전역학, 19세기 열역학과 전자기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그리고 초끈이론까지 다룬다.

그렇데 난해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설명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 결과로 우리의 일상과 인식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기술한다.

열역학 2법칙에 등장하는 엔트로피(무질서도) 개념을 설명하지 않으면서 그 법칙에 의거해 시간을 거꾸로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한다. 양자(퀀텀) 개념을 설명하지 않으면서 전자가 한 궤도에서 점프해 다른 궤도로 이동할 때마다 빛을 흡수 또는 방출하는 특징이 있다고 알려준다. 또 상대성이론을 장황히 설명하지 않으면서 시공간은 연극무대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배우라고 묘사한다.

이 대목에서 ‘이해한다’와 또 다른 의미로서 ‘안다’의 개념이 등장한다. 실제로 그 원리를 이해하고 그를 자세히 설명할 순 없어도 우리는 안다.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한다는 것을. 일단 납득한 뒤엔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해 많은 사람이 그걸 받아들여서 안다고 하지만 그걸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당장 지구의 자전 속도나 공전 속도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지구 반지름이 6400km이니 적도의 둘레는 대략 4만km에 해당합니다. 그걸 24시간으로 나누면 대략 시속 2000km이니 여객기 비행속도(1000km)의 2배가 됩니다. 공전 속도는 음속보다 더 빠릅니다. 그러니 지구는 태양 주변을 총알처럼 돌고 있는 셈입니다.”

과학적으로 위험한 질문, 왜?

[조영철 기자]
‘떨림과 울림’을 읽으면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풍부하지만 ‘왜’라는 질문에 대해선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양자역학의 세계는 왜 그렇게 기괴하게 작동할까 같은 질문에는 상당히 유보적이다. 우주가 초끈이라는 현의 진동으로 이뤄졌다는 초끈이론이 입증된다면 그런 본질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물리학에선 왜라는 질문이나 본질에 대한 추구가 정당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갈릴레오를 물리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는 자연과학의 질문이 철학의 질문과 다르다는 것을 천명했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오 이전에 철학의 일부였던 과학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줘야 했습니다. 물체는 왜 땅으로 떨어지고 불은 왜 하늘로 올라가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는 땅으로 떨어지려는 성질이 있고 불은 하늘로 올라가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어떤 본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과학은 그런 식의 답이 아니라 1초 후 물체가 어디에 있을까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뉴턴에게도 비슷한 질문이 던져집니다. 중력의 원인이 무엇일까. 달이 어떻게 지구가 있는 걸 알고,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을 받는가. 철학적으로 심오한 질문이지만 뉴턴은 한마디로 잘라냅니다. ‘모른다. 하지만 나의 이론은 달이 두 달 뒤 어디에 있을지를 정확히 알려준다.’”

과학은 근본 원인을 밝혀내는 것보다 그 작동 방식을 밝혀내는 것을 더 중시한다는 설명이다. 물론 과학자들 역시 다음 단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만 크게 집착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 있다.

하지만 ‘떨림과 울림’이 쉽게 다가서는 또 다른 이유는 인문학 텍스트가 풍부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컨택트’의 원작인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나 알베르트 카뮈의 소설 ‘전락’,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문·사·철 분야의 텍스트들이다.

“그 책을 설마 제가 다 읽었겠습니까. SF소설은 원래 좋아해 많이 읽었지만, 그 밖의 문학작품은 주변의 추천을 받고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칸트의 책처럼 글을 쓰고자 개론서 정도의 이해에 기초해 인용한 텍스트도 있고요. 인문학 텍스트를 많이 인용한 것은 딱딱한 과학지식을 좀 더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도록 비유와 은유로 쓴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상 못 한 부작용도 발생한다고 한다. 유비와 유추를 위해 쓴 것을 인문학의 정당성을 주창하는 논거로 활용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독자가 많다는 것이다.

“제가 양자역학이 참과 거짓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서양인보다 음양의 조화와 중용 같은 개념에 익숙한 동양인에게 더 쉽게 다가선다면서 그 유사성을 언급한 것을 오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책 강연을 끝내고 나면 양자역학과 불교의 연관성에 집착하는 분들이 꼭 있고요. 하지만 일부의 유사성을 놓고 전체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은 몹시 위험합니다. 과학과 철학이 갈라지는 지점은 물질적 증거입니다. 양자역학은 전자가 양립한다는 물질적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理)와 기(氣), 공(空)과 색(色)의 경우 그 하나하나를 물질적으로 보여줄 수도 없고, 양립가능하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떨림을 삼키려 하지 마라”

세상과 의식은 원자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간 뇌에서 탄생한 관념과 상상은 원자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진 제공 · 동아시아]
그는 기독교에서도 성경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이 과학 발전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됐는지를 상기시키면서 유물론에 입각한 과학과 관념론에 입각한 종교·철학을 뒤섞는 오류를 반복하지 말아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원자로 이뤄진 물질로 세상과 의식(인간의 뇌)이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과학자는 철저히 유물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뇌 속에서 구축된 추상과 상상의 세계는 결코 물질이 아닙니다. 사랑, 우정, 정의 같은 관념 위에 고도의 정합성을 구축한 종교와 철학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는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입증하는 데 과학이 왜 필요한지를 모르겠습니다. 자연과학은 매우 위험한 학문입니다. 증거에 입각해 세워진 학문이라 내일 당장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 위에 근거를 세우려는 종교와 철학 역시 일거에 무너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과학적 떨림에서 짜릿함을 느끼는 울림까지는 감사하지만, 그 떨림을 삼키려고 들지는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떨림과 울림’이 “콘크리트한 과학적 사실과 인간적 상상력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떨림과 울림’은 또 다른 의미로 떨고 있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67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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