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 전이 과정-우주진화 연구… 한국 슈퍼컴, 엄청 세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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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에 5호기 ‘누리온’ 도입

암세포는 생체 내 환경에서 어떻게 전이될까. 138억 년 전 빅뱅 이후 우주가 진화하면서 형성된 거대구조는 은하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정부가 9년 만에 국가 연구용 슈퍼컴퓨터를 새로 교체하면서 이런 질문들의 답을 찾으려는 국내 과학자들의 기대감도 한껏 높아졌다. 기존 슈퍼컴퓨터로는 사실상 연구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국가 연구용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이 다음 달 3일 공식 개통된다. 5호기는 높이 2m, 폭 1.2m의 대형 컴퓨터 128개를 연결한 병렬식 슈퍼컴퓨터다. 연산 속도는 25.7PF(페타플롭스·1PF는 초당 1000조 번의 실수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2009년 도입된 4호기(0.365PF)보다 70배 이상 향상됐다. 개인용컴퓨터(PC) 2만 대와 맞먹는 수준으로, 사람 70억 명이 420년 동안 쉬지 않고 계산해야 하는 양을 1시간 만에 처리할 수 있다. 올해 6월 기준 세계 랭킹 11위에 올랐다.

○수백억 개 입자로 세포 1개 3D로 구현

가장 큰 변화는 4호기에서 2, 3년 이상 걸리거나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대형 문제들을 풀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세포 모델링이다. 5호기를 활용하면 약 100조 개의 원자로 이뤄진 세포 1개를 3차원(3D)으로 구현하고 세포 표면의 세포막이나 수용체와 세포 주변의 약물, 바이러스, 항원·항체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이는 신약 개발이나 질병 연구에 활용된다.

곽상규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는 “세포 간 상호작용을 보려면 세포 하나를 최소 100억 개 이상의 입자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하는데, 4호기에선 입자를 1억 개 이상 늘릴 수 없어 세포의 일부를 2차원으로 모사하는 데 그쳤다”고 말했다. 반면 5호기를 사용하면 세포 수를 충분히 늘리는 것도 가능해 암세포의 전이 과정 같은 생체 내 현상까지 연구할 수 있다.

이제는 살아 있는 세포의 움직임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됐지만,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론을 바탕으로 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꼭 필요하다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염민선 KISTI 계산과학응용센터장은 “관찰만으로는 세포가 왜,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다”며 “모델 예측은 실험의 효율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 규모 우주 진화 시뮬레이션

고등과학원은 5호기를 활용해 세계 최대 규모의 우주 진화 시뮬레이션을 수행할 계획이다. 물리학 법칙을 적용해 2조 개 이상의 입자를 이용해 138억 년 전 빅뱅 직후부터 우주를 시간에 따라 진화시키는 것이다. 김주한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연구교수는 “입자 수가 많을수록 더 넓은 시야로 우주를 볼 수 있고, 우주 거대구조가 은하의 생성과 진화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며 “우주론 검증과 우주탐사 위성 임무 설계 등에 활용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한국천문연구원도 암흑물질에 양성자, 중성자 등 각종 중입자(바리온)까지 고려해 우주 진화 과정의 다양한 천문현상을 모사할 계획이다. 역시 세계 최대 규모다. 신지혜 천문연 연구원은 “핵반응에 따른 별의 생성과 초신성 폭발, 은하의 생성과 진화 등을 모두 시뮬레이션에 담을 예정”이라며 “기존보다 27배 큰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우주를 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5호기는 인공지능(AI) 개발과 해저로봇, 항공기의 동역학 연구, 태풍 등 자연재해 예측, 신소재 개발 등에도 활용할 수 있다. 연구 시간의 단축 효과도 클 것으로 보인다. 가령 4호기로 2개월 이상 걸렸던 계산을 5호기가 한다고 가정하면 단 하루 만에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다만 조민수 KISTI 슈퍼컴퓨팅서비스센터장은 “슈퍼컴퓨터는 최소 5년 단위로 교체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예산 부족으로 5호기 도입이 늦어져 많은 연구가 선진국에 뒤처진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도입 당시 세계 14위였던 4호기는 지난해 이미 500위 밖으로 밀려났다.

올해 6월 기준 세계 1위의 슈퍼컴퓨터는 미국의 ‘서밋’(207PF)으로 5호기보다 10배가량 성능이 좋다. 새로운 순위는 이달 13일(현지 시간) 미국 댈러스에서 열리는 ‘2018 슈퍼컴퓨팅콘퍼런스(SC)’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최희윤 KISTI 원장은 “슈퍼컴퓨터는 국가 전략 장비이자 AI 시대 핵심 인프라”라며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투자와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송경은 동아사이언스 기자 kyungeun@donga.com
#암세포#슈퍼컴퓨터#누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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