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백질 히잡 자르고, 브라도 벗었다…그녀들이 웃옷을 벗은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8일 14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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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학과 12학번으로 입학해 학생회 활동을 했다. ‘알바연대알바노조’에서 적극 목소리를 냈다. 2015년 1월 일명 ‘김군 사건’이, 2016년 ‘강남역 살해 사건’이 터졌다. 당시 온·오프라인을 통해 페미니즘을 파고들었다.

‘불꽃여성농구단’ 동료들과 2016년 5월 21일 여성운동단체 ‘불꽃페미액션’을 만들었다. 지난 1일 페이스북코리아에 항의하는 ‘찌찌해방만세’ 시위를 벌인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가현(26) 씨 이야기다.

“퍼포먼스 차원이었어요. 취재진이 없으면 우리끼리 사진 찍고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7일 양천구에서 만난 가현 씨가 말했다. 상의 탈의 시위가 남긴 인상은 강렬했다. 대중은 미투 운동 이후 소강상태였던 페미니즘을 다시 돌아봤고, 저마다 ‘신체의 자유’란 물음표를 머릿속에 그렸다.

●불꽃페미액션: 가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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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페미액션’은 낙태죄 폐지와 천하제일겨털대회 등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여성해방 운동을 하는 페미니스트 그룹이다. 집행부 5명과 회원 200여 명은 이슈가 있을 때마다 연대하고 행동한다. 회원 대부분은 20대다. 30대는 20% 안팎이다.

가현 씨는 웃통을 두 번 깠다. 지난 5월 ‘월경페스티벌’과 이번 페이스북 항의 시위에서다. 두 번째 탈의는 첫 번째 시위 때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이 음란물로 파악해 삭제하면서 이뤄졌다. 남성 가슴 노출 사진은 그대로 두면서 여성 가슴 사진만 삭제한 데 항의하는 뜻으로 지난 1일 시위를 진행한 것.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이후 뜨거운 설왕설래가 오갔다.

“벗고 다니겠다는 게 아니라 벗을 수도 있다는 거잖나. 적극 지지한다.”(29세 여성 학원강사)

“반대하진 않지만 상의 탈의를 무기로 삼아선 안 된다. 이럴 땐 드러내고 저럴 땐 ‘시선강간’이라 공격하고. 잣대를 일원화해야 한다.”(40대 남성 언론인)

“가슴을 보면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자가 초식을 할 수 있나.”(20대 남성 학생)

(이에 반발하며) “그건 학습된 거다. 가슴을 드러내고 생활하는 부족도 있고, 조선시대 아들 낳은 여성들도 가슴을 내놓고 다녔다.”(20대 여성 학생)

응원을 건넨 이들도 많았지만 온라인에선 비난이 쏟아졌다. “상의 탈의를 하면서 ‘시선강간’으로 남성을 비난하느냐. 짧은 치마를 입고 계단을 오를 땐 뒤따르는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지 말라”는 댓글이 가장 흔했다. 이에 가현은 “가리지 않으면 몰래 카메라에 찍힐 위험이 있다. 여성의 안전과 남성의 불쾌한 기분, 둘 중 무엇이 중요한가”라고 반문했다.

외모를 비하하거나 성희롱에 가까운 댓글도 넘쳤다. 가현을 비롯한 회원들은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시위의 뜻과 방식에 대한 비판이라면 수용하겠는데, ‘고추가 안 서네’ ‘뚱뚱하네’ 하는 글은 “좀 그랬다.”

“사실 비난엔 익숙해요. 가슴을 ‘까기’ 전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는 순간부터 상상 가능한 온갖 욕이 날아왔죠. 한데도 등에 살이 접혔다는 이야기는 상처가 됐어요. ‘내가 더 예뻤더라면 덜 비난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탈코르셋운동: 2030 여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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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를 거치며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로 여성의 신체가 대상화됐다. 인터넷에 가둬두고 언제든 꺼내보는 물건처럼 된 것이다.”(김혜경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뒤에서 몰래 성적 대상화를 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불법촬영 범죄가 대표적이다.”(가현)

“남자는 웃통을 벗으면 상남자고 여자는 비키니를 입어야 상여자인가. 2000년대 들어 여성을 소비하는 콘텐츠가 넘쳐나기 시작하면서 편견이 심화됐다고 본다.”(30대 페미니스트)

가슴 해방 운동은 이에 맞서는 방식이다. 1968년 미국 미스코리아대회장 밖에선 속옷 태우기 운동이 있었다. 2000년대 한국 여성단체는 ‘노브라 선언’을 했다. 2009년 우크라이나에서 결성된 국제여성인권단체 ‘페멘’(FEMEN)은 가슴을 노출하고 꽃 왕관을 쓴 채 여성 인권을 외친다. 2015년 미국에선 가슴 노출을 단속하는 공권력에 맞서 ‘프리 더 니플’(Free The Nipple) 운동을 벌였다.

‘코르셋 벗기’ 운동도 같은 맥락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20대 여성 중심 카페 ‘여성시대’, ‘쭉방카페’ 등에는 코르셋 벗기에 동참한 이들의 인증샷과 간증이 넘쳐난다.

‘단백질 히잡(긴머리) 자르고 드라이기도 안 쓴다. 사람처럼 살고 있다’, ‘화장품 살 돈으로 책사고 맛난 거 먹는다. 내 얼굴을 평가하지 않게 된다. 자존감이 높아진다.’ ‘봉긋한 가슴을 위해 하던 브래지어를 벗었다. 세상 시원하다. 빨랫감이 줄었다. 브래지어 비싼데 돈 굳었다.…’ 등이다.

코르셋 벗기를 주도하는 건 1020세대. 30대도 간간이 참여한다. 정연보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모 평가, 외모로 인한 차별, 성적 대상화가 여성에게 더 심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탈코르셋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코르셋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직장인 송모 씨(27)는 “온라인 카페에서 화장품을 부순 인증샷을 올리는 이들이 많은데 실제 주변에 그런 친구는 단 1명”이라며 “이유야 어쨌든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고 했다. 두 아이를 둔 워킹맘 김모 씨(37)는 “운동을 통해 뱃살이 줄어들 때 뿌듯함을 느낀다”며 “탈코르셋 동참 여부는 선택의 문제”라고 했다. 가현 씨는 “동참하지 않는 여성들이 자책하지 않았으면 한다. 탈코르셋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여혐vs 남혐: 1990년대생 남성 이야기

지난달 27일 열린 ‘2018 천하제일겨털대회’에 참가한 이가현씨. 제모를 비판하고 겨털을 긍정하는 축제다. pixabay
지난달 27일 열린 ‘2018 천하제일겨털대회’에 참가한 이가현씨. 제모를 비판하고 겨털을 긍정하는 축제다. pixabay
1980년대의 시니어페미니스트,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영페미니스트에 이어 2015년 이후 넷페미 세대가 등장했다. ‘메갈리아’ ‘워마드’ 등 온라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뜻한다. 개별로 활동해 일상적 문제에 보다 집중하며 온라인이 무대인 탓에 과격한 성향을 띤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오랜 기간 응축된 페미니즘 에너지가 온라인과 만나 폭발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여혐vs남혐’ 논란으로 번지는 점은 안타깝다는 의견이 나온다. 20대 취업준비생 강모 씨는 “넷페미들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남성에서 찾는다. 양보 없이 뭐든 더 내놓으라는 식이어서 거부감이 든다”고 했다. “어머니 세대가 겪은 차별을 이용해 혜택을 받으려는 것 같다”, “남성에게 여성이 일상에서 느끼는 공포심을 체험해보라며 화장실 몰카를 설치하는 건 범죄”라는 비판도 있다.

1990년대 생 남학생들은 여성들에게 학업경쟁 등에서 밀려난 첫 번째 세대다. 이들은 대체로 페미니즘에 부정적이다. ‘82년생 김지영’에 대항한 ‘90년생 김지훈’ 소설 크라우드펀딩 활동, 페미니즘 성향을 보인 연예인들 비난 등의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자연히 페미니즘 이슈마다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이는 시대 배경과 관련이 깊다는 분석이다. 과거 2030남성에게 결혼과 취업은 도달 가능한 목표였다. 지금은 아니다. IMF 한국외환위기 이후 개별경쟁 가속화, 노동인구 고령화, 대학졸업 인구 증가에 따라 청년세대 전체가 진창에 빠졌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청년세대가 더 나은 시대를 고민하기 힘든 사회구조다. 눈앞의 논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청년세대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정책이 시급하다”고 했다.

계급문제를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택광 교수는 “페미니즘 운동은 ‘기성세대 아웃’ 성격이 짙다. 남성중심 체제에 복무하는 기성세대 여성도 ‘아웃’ 대상에 포함된다”며 “기존 체제에 종속된 남녀 간 갈등은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생 여성들은 동년배 남성들의 인식을 어떻게 느낄까. ‘불꽃페미액션’의 선물 씨는 “동년배 페미니스트가 증가하는 추세지만 대부분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얕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덕목은 여성의 말을 경청하고 남성 지인들에게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불꽃페미액션’의 한솔 씨는 “대부분 무관심한 상태에서 남성주류 매체를 통해 페미니즘을 접한다. 그러니 막연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다”며 “성평등은 모든 성별이 함께 잘 살기 위함이다. 거부감을 조금만 걷고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 우리 모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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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링(Mirroring·혐오 뒤집어 보여주기)은 여성이 받은 혐오를 남성에게 덧입혀 되돌려주는 전술이다. ‘된장녀’에 대응하는 ‘한남충’을 만들어 모욕을 주는 식이다. 최근엔 ‘미러링’으로 남성에게 코르셋을 씌우기도 한다. 가슴, 허리, 다리 등으로 여성의 신체를 쪼개 품평하는 남성문화를 모방해 넓은 어깨, 핑크빛 입술, 잘록한 허리, 상·하체 비율을 따지며 외모 잣대를 들이대는 것. 최근 남성용 핑크색 립밤이 출시되기도 했다.

남성 혐오 사이트 ‘워마드’는 장애인·성소수자 같은 사회적 약자도 미러링의 대상으로 삼는다.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기도 한다. 최근 사진과 워마드 게시판에는 남성 화장실을 불법촬영한 게시글이 올라온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여성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넷페미니스트로 활동하는 최모 씨(26)는 “워마드의 취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남성들과 공존해야 하므로 이들을 덮어놓고 비난하는 행위는 반대한다”고 했다. 한 시니어페미니스트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성문제, 계급문제, 탈식민주의문제 등 맥락에서 진지하게 이슈에 접근했다. 요즘은 역사의식 구조의식이 빈약하다”며 “역사의식을 가족 전체 맥락을 읽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여성계가 정치 세력화를 우선순위에 두고 ‘워마드’의 문제 행동에 침묵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페미니스트 머릿수 늘리기에 골몰해 범죄 행위에도 눈을 감는다는 지적이다.

취재하면서 만난 20대 여성들은 같은 점수를 받고도 남성이 취업에 유리하다는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게임업계에 취업하고픈 꿈이 좌절됐을 때 페미니즘을 찾았다고 말했다. ‘노오력’ 해도 뚫기 힘든 벽 앞에 기댈 곳은 페미니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면하다 막 터진 넷페미니즘 에너지는 곳곳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이택광 교수는 “방향을 잡고 에너지를 분출할 때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사회적 모순 해결을 과제로 삼은 과거와 달리 더 나은 사회 건설을 고민한다. 선진국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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