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어때서? 소녀감성 할매-모험왕 할배 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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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주름잡는 실버군단

속사포 랩도 거뜬히 소화해 ‘할미넴’ ‘국민 할매’로 인기를 얻은 배우 김영옥 씨(왼쪽)는 최근 조부모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윤식당’의 중심축 역할을 한 배우 윤여정 씨(오른쪽)는 젊고 활달한 감각으로 아들딸 또래의 배우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리며 균형을 잡았다. 동아일보DB
속사포 랩도 거뜬히 소화해 ‘할미넴’ ‘국민 할매’로 인기를 얻은 배우 김영옥 씨(왼쪽)는 최근 조부모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윤식당’의 중심축 역할을 한 배우 윤여정 씨(오른쪽)는 젊고 활달한 감각으로 아들딸 또래의 배우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리며 균형을 잡았다. 동아일보DB
나이: 평균 80세 이상. 성격: 모험과 도전을 즐김. 취미: 버킷리스트 작성. 특기: 주저하기엔 인생이 짧다는 과감한 결단력. 싫어하는 말: “그 연세에 어떻게….” 싫어하는 사람: 연령차별주의자. 주의사항: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대하면 화낼 수 있음.

최근 주목해서 봐야 할 프로필이다. 문화계 전반에서 이런 프로필을 가진 할매할배들이 급부상 중이다. 그동안 노인이나 노년 문제를 다룬 콘텐츠는 대중성과 거리가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진취적이고 발랄한 세계관을 가진 70대 이상 할매할배들이 문화계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힙한’ 할매할배들이다.

○ ‘소녀 감성 할매’에서 ‘할매 페미니스트’까지

출판계에서는 아흔 살이 넘은 저자들이 쓴 에세이집이나 이들을 다룬 책이 쏟아지고 있다. 올해 1월에 출간된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이봄·사진)은 다이어트로 자기관리를 하고 디즈니랜드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며 즐거워하는 소녀 감성 충만한 아흔 살 할머니의 이야기다. ‘젊은 내가 더 할머니같이 산다’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독자들의 호응이 쏟아지며 출간 첫 주에만 3000권이 팔렸다.

사실 이 책은 일본에서 20년 전에 출판됐다. 고미영 이봄 대표는 “이제 우리도 이렇게 쾌활하고 활달한 할머니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실제로 혼자 영화관에 가고 미국 수사물 CSI에 푹 빠진 원로 여성학자 박혜란의 ‘나는 맘 먹었다, 나답게 늙기로’(나무를심는사람들)처럼 톡톡 튀는 한국 할머니들의 이야기도 주목받고 있다.

요즘 인기 있는 할매할배는 체면치레, 그럴듯한 어른 노릇보다는 모험, 열정에 우선순위를 둔다. 전문의로 일하다 90세가 다 돼 등단한 김길태 할머니의 ‘90세의 꿈’(아트와), 100세에 세계적 화가가 된 모지스 할머니의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수오서재)에서처럼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도전정신도 보여준다.

때론 젊은 사람보다 더 급진적인 주장도 편다. ‘나답게 살고 나답게 죽고 싶다’(21세기북스)를 쓴 ‘오싱’의 작가 하시다 스가코(93)는 “신나게 살다 깔끔하게 안락사로 죽고 싶다”는 도발적 주장으로 화제가 됐다. 출판사 측은 “이 저자는 최근까지도 크루즈 여행과 세계 일주를 떠나며 왕성하게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고 전했다.

○ 카리스마형 어른 지고 소통형 어른 뜨고

영어 실력은 기본, 흰 티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할머니 패셔니스타나 속사포 랩에 그루브를 탈 줄 아는 할미넴은 대중문화에서도 인기다. 최근 종영한 tvN ‘윤식당2’에서 젊은 배우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리며 중심축 역할을 한 배우 윤여정 씨(71)가 대표적이다. MBC는 최근 유창한 랩 실력으로 ‘원조 할미넴’으로 불리는 배우 김영옥 씨(81) 등이 손자들과 출연하는 ‘할머니네 똥강아지’란 파일럿 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했다. 평균 연령 70세 이상의 할배들이 버킷리스트를 실현해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 ‘비밥바룰라’도 입소문을 타고 흥행 중이다. 대중문화 주변부에 머물던 노인들이 중심부 전면에 등장한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할매할배 이야기가 인기를 끄는 건 노년에 대한 관심이 전 세대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노년은 노인들만의 이야기라고 치부하던 이들조차 이제는 전 세대, 한국 사회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며 “노인들 역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커졌다”고 말했다.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며 노후 불안 같은 암울한 이야기 대신 새로운 노년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욕구도 커졌다. 대중문화가 이를 적절하게 담아내며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할매할배들의 발랄한 감각과 도전정신, 열린 마음과 소통, 포용하고 배울 줄 아는 삶의 태도가 그간 빈칸으로 남아 있던 우리 시대 새로운 어른의 ‘롤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은영 대중문화평론가는 “훈계하는 ‘카리스마형 어른’이 지는 대신 소통하고 도전하고 노력하는 새로운 어른들이 대중의 각광을 받고 있다”며 “젊은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원숙함과 지혜를 갖춘 할매할배들이 이상적인 모습의 어른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노인#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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