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릴 수 있는 사람들 길바닥에 내쳐져”…메스 대신 펜을 든 이국종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5일 14시 35분


코멘트

골든아워 / 이국종 지음 / 440쪽(1권)·380쪽(2권)·각 1만5800원·흐름출판


“누군가에겐 죽음이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단호함을 넘어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북한 귀순병사 오청성 씨(24)의 수술을 집도했던 지난해 11월,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식당에서 기자와 만난 이국종 교수(49)는 집에 못 간지 보름이 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파란색 수술 모자에 흰 의사 가운 차림이었다. 그의 시간은 철저히 환자에게 맞춰져 있었다.

중증외상 의료계의 산증인인 그는 메스 대신 틈틈이 펜을 잡고 5년간 글을 썼다. ‘골든아워’를 보자마자 그와 짧은 시간 대면했던 소소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군분투한 한 의사의 비망록이자 국내 중증외상 의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보고서다.

“커튼 밖으로 나와 중환자실 복판에 서서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방이 생사를 오가는 침상으로 가득했다. 그 발치마다 도사린 사신(死神)들이 환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주변이 온통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제목 그대로 ‘골든아워’는 생과 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하지만 그는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평균 이송 시간은 245분”이라며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길바닥에 내쳐지고 있다.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사망’이었다”고 썼다.

2002년 외상외과에 발을 들인 그는 국제 표준의 중증외상 시스템을 국내에 도입하기 위해 긴 싸움을 계속해왔다. 마침내 2012년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전국 거점 지역에 정부지원을 받는 권역외상센터가 설립됐다. 무조건 환자를 살려야 하는 중증외상 치료는 늘 적자에 시달렸고 비용과 효율성을 따지는 병원과 정부의 압박도 거셌다.

생사의 현장에서 그는 냉철하게 순간을 묘사했다. 2011년 소말리아 해적에게 총탄을 맞은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66) 옆에도, 2014년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석 선장을 구하기 위해 오만으로 떠난 이 교수는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않는 법이다. 석 선장은 무겁게 떨어지는 칼날이었다”고 당시 중압감을 회상했다. 세월호 침몰 소식에 구조 헬기를 타고 현장 접근을 시도했지만 정부의 제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그는 배가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봐야했다.

“2011년 석해균 선장이 복지부 캐비닛에 처박혔던 중증외상센터 정책을 끌어내더니, 북한군 병사가 죽어가던 중증외상 의료시스템을 건져낸 셈이었다.”

지난해 북한 귀순병사 오 씨가 기적적으로 소생하며 중증외상 의료 현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일었다. 정치권도 주목했다. 그간 의료 시스템 구축을 위해 노력해도 만나기조차 어려웠던 정치인들이 그를 찾았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석 선장을 수술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지원을 약속해줄 것 같았던 정·관계와 언론이 흩뿌리던 모든 말잔치의 결과물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냉혹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업(業)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문장도 그를 닮았다. 글에는 좌절을 넘어 분노가 서려있다. 허무한 감정과 비장함을 담은 문장이 언뜻 김훈 작가(70)의 그것을 닮았다. 그는 실제로 김 작가의 열혈 팬이기도 하다. 그는 “‘칼의 노래’를 등뼈 삼아 글을 정리해보려 애썼다”고 적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