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함이 인간다움이다”…반(反)실용주의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 별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9일 21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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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의 획일적 강박성에 저항해 1970년대 이탈리아 포스트모던 디자인 주도
웃는 얼굴 새겨진 와인오프너 등 ‘보기 아름답고 쓰기 불편한’ 작품들 남겨
2015년 DDP 회고전 때 “내가 발굴한 건축가 하디드가 설계한 건물” 감회 젖기도

2015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자신의 회고전을 앞두고 방한해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겸 건축가 알레산드로 멘디니. 동아일보 DB
2015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자신의 회고전을 앞두고 방한해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겸 건축가 알레산드로 멘디니. 동아일보 DB
“편리한 기능성만이 산업디자인의 최우선 가치가 아니다. 나는 ‘불완전하기에 인간다운’ 디자인을 추구해왔다.”

웃음 짓는 사람 얼굴 문양이 새겨진 손잡이가 달린 ‘쓰기 불편한’ 와인병 오프너 ‘안나G’를 고안한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겸 건축가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18일(현지 시간) 오전 별세했다. 향년 88세.

생활용품업체 알레시(ALESSI)가 1994년 생산을 시작한 ‘안나G’는 손잡이를 시계 방향으로 돌려 스크루 송곳을 코르크 마개에 박아 넣으면 병 입구를 밀어낼 두 지지대가 기지개 켜는 사람의 팔처럼 점점 위로 쳐들리도록 고안된 와인병따개다. 주방 장식장에 올려놓으면 산뜻해 보이지만 코르크를 부스러뜨리기 쉬운 까닭에 실제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생활용품업체 알레시(ALESSI)의 와인병 오프너 ‘안나G’(1994년). 웃음 짓는 사람 얼굴 문양이 새겨진 손잡이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이탈리아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생활용품업체 알레시(ALESSI)의 와인병 오프너 ‘안나G’(1994년). 웃음 짓는 사람 얼굴 문양이 새겨진 손잡이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기능주의만이 제품 사용자를 배려하는 최선이 아니다”라는 철학은 멘디니의 생애를 관통한 디자인 철학이었다. 1931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그는 폴리테크니코디밀라노대 건축학과를 1959년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올리베티레터라32’ 타자기로 유명한 디자이너 마르첼로 니촐리의 사무소에서 실무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멘디니는 1979년 ‘스튜디오 알키미아’에 참여하면서 모더니즘 디자인의 구태의연한 경직성에 저항해 강렬한 색채와 화려한 장식을 강조한 실험적 디자인 작품을 내놓았다. 이어서 획일적 모더니즘에 반발하고 나선 동료 산업디자이너들과 함께 ‘멤피스 그룹’을 결성하고 포스트모던 디자인 운동을 펼쳐나갔다.

이 시기에 대표작 중 하나인 ‘프루스트 팔걸이 의자’(1978년)가 발표됐다. 이 의자는 디자인에 ‘새로운 요소’를 배제한 것이 특징이다. 고전적 바로크 양식을 따른 곡선형 목재 프레임 위에 쿠션을 붙이고 미세한 색점 수백 개를 수공 작업으로 찍은 덮개를 씌웠다. 경쟁적으로 ‘허망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디자인에 대해 “더이상 새로운 건 없다”는 도발적 선언을 들이민 것이다. 작품 제목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20세기 의자 디자인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에 대해 멘디니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지적 실험을 적용해본 작품이었다. 매우 비싸고, 기능적 쓸모가 거의 없으면서, 보는 이에게 시각적인 즐거움만을 안겨줄 수 있는 의자를 만들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알레시와의 협업으로는 주방용품 ‘안나 시리즈’와 아울러 ‘모카에스프레소 커피메이커’가 유명하다. 이 모카커피 알루미늄 포트는 “실용성이 디자인의 절대선은 아니다”라고 주장한 멘디니의 작품답지 않게 전 세계 가정에서 널리 애용되는 제품이다.

멘디니는 2015년 10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자신의 작품 회고전에 참석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1980년대에 건축전문지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처음 발굴해 커버 기사로 소개했던 당시의 무명 건축가 자하 하디드(1950~2016)가 설계한 건물에서 큰 전시를 열게 돼 감회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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