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의 딴 이름 재성은 ‘해자 있는 성’”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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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효 경주문화재硏 팀장 논문
‘왕이 머무는 곳’ 기존 해석과 달라… 같은 지형 고려 서경도 ‘재성’ 별칭

경주 월성 동쪽에 복원된 해자(垓字)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경주 월성 동쪽에 복원된 해자(垓字)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파사왕 22년(101년) 금성(金城)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불렀고, 혹은 재성(在城)이라고도 불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경주 월성에 대한 이 같은 기록이 나온다. 초승달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월성(반월성)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2세기부터 800여 년간 신라의 왕궁으로 역할을 했다. 당대에는 ‘재성’으로도 불렸는데 월성 유적지에서는 ‘在城’이라고 적힌 명문기와가 출토되기도 했다. 그간 학계에서는 재성의 의미에 대해 ‘재(在)’의 뜻인 ‘있다’에 주목하거나 신라의 이두식 발음 ‘겨(在)’의 변형인 ‘계시다’로 해석해 “왕이 머무른 성”이라고 봤다. 하지만 이 같은 인식에 의문을 들게 하는 사료가 등장한다.

“서경(西京·평양)에 행차하였고, 새로 궁부(宮府)와 원리(員吏)를 두었으며 비로소 재성(在城)을 쌓았다.”

고려 건국 초기였던 922년 평양의 모습을 서술한 고려사(高麗史)에서 재성이 다시 나타난 것. 918년 건국 이래 고려의 황제는 수도 개경(개성)을 한 번도 옮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재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경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문헌조사팀장은 최근 한국고대사학회 학술대회에서 ‘신라 재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논문을 통해 “월성의 또 다른 명칭 ‘재성’은 해자(垓字)를 갖춘 성이라는 뜻”이라며 학계의 통설과 다른 새로운 주장을 내놨다.

논문에 따르면 고려사에는 “5년(922년) 처음으로 서경(西京)에 재성(在城)을 쌓았다. (재(在)는 방언(放言·우리말)으로 밭도랑(畎)을 뜻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재(在)’의 용례에 대해 밭도랑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밭도랑은 비가 많이 올 때 물을 빼기 위해 밭두렁 안쪽을 따라 고랑보다 깊게 판 물길이다. 이는 물이 흐르는 동시에 성 안팎을 구분하는 해자의 모습과 같다. 실제로 월성의 동-서-북쪽에는 인공 해자가 놓여 있었고, 남쪽으로 흐르는 남천을 자연 해자로 삼았다. 평양성 역시 동쪽의 대동강, 서쪽 보통강과 함께 평양성 남문 앞에 해자를 쌓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옛 평양성의 지세(地勢)는 신월성(新月城)이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표현도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전 팀장은 “신라의 주요 성은 대부분 산성(山城)이었기 때문에 해자를 갖춘 월성의 지형적 특성이 부각돼 명칭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며 “그동안 월성 관련 고고학 발굴 조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문헌 연구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삼국사기#경주 월성#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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