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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재 교수의 지도 읽어주는 여자]고통이 빚은 매혹의 예술… “인생이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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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재 교수의 지도 읽어주는 여자]고통이 빚은 매혹의 예술… “인생이여, 만세”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입력 2018-08-13 03:00수정 2018-08-13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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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프리다 칼로의 멕시코와 미국
프리다 칼로의 ‘푸른 집’ 멕시코 코요아칸의 ‘푸른 집’. 프리다 칼로의 아버지가 지은 집. 칼로는 꽃으로 실내를 장식하고 직접 요리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프리다 칼로 박물관 홈페이지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멕시코의 보물’로 추앙받는 프리다 칼로(1907∼1954)의 아버지는 독일에서 멕시코로 이주한 유대인이었다. 현지 혼혈 여성과 결혼했고 사진작가로 성공했다. 셋째 딸인 칼로는 6세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했지만 씩씩했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두 번의 큰 사고로 꿈을 접어야 했다.

1925년 9월 17일 멕시코 독립기념일에 일어난 전차 사고가 불행의 시작이었다. 골반뼈가 으스러지고 척추가 부러져 평생 35번 넘게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나를 파괴하는 모든 것은 나를 성숙시킨다”며 고통을 이겨냈다. 부모에게 선물 받은 그림 도구로 병상에서 완성한 첫 작품은 자화상이었다. 병실에 묶여 있었지만 치열한 독서와 외국어 공부로 멕시코 설화와 인도 힌두교의 칼리 여신, 유대교의 모세, 중국·러시아 혁명가의 사상까지 섭렵하며 지적 내공을 다졌다.

두 번째 사고는 21세 연상의 멕시코 유명 화가 디에고 리베라(1886∼1957)와 사랑에 빠진 것. 두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칼로와 결혼한 리베라는 그녀를 신세계로 인도했다. 리베라의 화실이 있던 멕시코 쿠에르나바카는 독일 지리학자 훔볼트가 ‘영원한 봄의 도시’라고 부른 아름다운 고산도시였다. 원주민의 공예품과 유물을 수집하며 여행하던 둘은 찬란했던 마야·아스테카 문명을 재발견했다. 칼로는 경제 활동과 가정생활을 주도하는 테우안테펙 여성들을 보며 힘을 얻었다. 화려한 자수의 테우아나 전통의상을 즐겨 입은 칼로는 보그지 표지모델로 선정되기도 했다.

1930년대 벽화 작업을 의뢰받은 리베라와 미국에서 지낸 칼로는 샌프란시스코 병원에서 명의를 만나 희망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거대한 닭장’처럼 답답했다. 그녀가 진정 행복했던 곳은 멕시코시티 인근의 신도시, 코요아칸의 고향집이었다. 악귀를 쫓기 위해 파란색으로 칠한 ‘푸른 집’에서 전통의상과 장신구로 단장하고 정원을 가꿨다.

리베라의 바람기에 질린 칼로는 독립을 선언하고 자유롭게 산다. 멕시코로 망명한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를 매혹시키고 일본계 미남 조각가 노구치 이사무와도 염문을 뿌렸다. 그녀에게 미국은 욕망의 해방구였다. 전쟁을 피해 유럽의 인재, 특히 모계사회 전통이 깊은 유대인이 몰리며 문화·예술 중심지로 급부상하던 뉴욕에서 행운이 따랐다. 사진작가 니컬러스 머리와 열애하던 그녀는 예술가로 전성기를 누린다. 리베라의 읍소로 둘은 이혼 후 1년 만에 재결합한다.

그녀를 ‘폭탄을 둘러싼 리본’이라고 극찬한 평론가 앙드레 브르통이 기획한 1939년 파리 전시 역시 대성공이었다. 칸딘스키는 눈물을 흘렸고, 경탄한 피카소는 작은 손 모양의 귀걸이를 선물했다. 루브르 박물관이 작품을 구매했다. 47세에 눈감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은 멕시코 민중이 가장 사랑하는 과일이자 장례식을 상징하는 수박에 새긴 ‘삶이여, 만세’였다.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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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멕시코의 보물#디에고 리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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