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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에 끝까지 맨손으로 맞서… ‘일제 철옹성’에 균열 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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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에 끝까지 맨손으로 맞서… ‘일제 철옹성’에 균열 일으켜

안영배 기자 입력 2018-07-14 03:00수정 2018-07-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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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11화> 비폭력
‘평양 3·1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숭실학교 교원과 학생들. 1917년 결성된 비밀 항일결사 단체인 ‘조선국민회’ 회원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이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모든 성공적인 혁명은 썩은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부패한 사회체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진다는 의미다. 미국 경제학자 갤브레이스(1908∼2006)가 내건 성공적 혁명의 조건으로 보면 3·1운동은 무모한 행동이자 실패로 가는 길이었다. 1919년 일제의 식민지배 체제는 ‘썩은 문’이기는커녕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의 일원이자 세계 5위권 군사강국이었다.

3·1운동 33인 민족대표는 그 철옹성을 무너뜨리는 수단으로 ‘비폭력’을 선택했다. 3·1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은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오인(吾人)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고 비폭력 평화 원칙을 강조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민족대표들은 내란죄로 몰려 사형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유언처럼’ 재차 비폭력을 당부했다.

“조선 민족대표 제씨(諸氏)는 최후의 일언(一言)으로 동지에게 고하기를, 우리는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노니 우리 신성한 형제는 우리의 본래 뜻을 관철하여 몇 년 며칠까지든지 우리 이천만 민족 최후의 한 사람이 남더라도 결단코 난폭한 행동이나 파괴적 행동을 하지 말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난폭하고 파괴적 행동을 하면 이는 천고에 구제할 수 없는 조선을 만들 것이니 천만 주의하고 보중(保重)할지어다.”(조선독립신문 제1호, 1919년 3월 1일자)

평화적 비폭력 운동은 일제에 탄압 빌미를 주지 않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한국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경성(서울)에서는 십수만 명의 군중이 움직였어도 폭력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시위 도중 일본인을 구타하거나 그들의 물품을 파괴 또는 약탈하는 행위 역시 발생하지 않았다. 개성군수 야마사키는 개성의 호수돈 여고보(女高普) 여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나는 일찍이 어린 여학생들이 자기 조국을 위해 이처럼 열렬히 앞장섰다는 사실을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본 적이 없다”며 감격했다. 평화 시위는 일본 사람들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일경의 첫 발포

독립만세운동 당시 숭실학교 학생들이 직접 제작해 교정에 걸었던 태극기(크기 166.0×125.5cm). 3·1운동에 사용됐던 대형 태극기로는 유일하게 남은 국기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경성(서울)의 비폭력 지침은 평안북도 서해안에 위치한 선천에도 전달됐다. 그러나 결국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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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오후 2시 20분경, 보성여학교 학생 60여 명과 신성학교 학생 수백 명이 ‘조선독립단’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대가 군청 앞에 도달하였을 때 일본 수비대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백은 최재화 목사의 생애’)

일본군 수비대와 기마(騎馬) 경찰이 달려와 군청과 경찰서 앞을 질서 있게 행진하는 시위 군중을 상대로 총질을 한 것이다. 시위대의 기수(旗手)인 신성학교 교사 강신혁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때 모두 12명(일본 측 기록)의 사상자가 발생했다.(‘한민족독립운동사’ 3권 3·1운동)

일제가 소읍(小邑) 선천에서 맨손인 군중을 상대로 무차별 총질을 한 데는 그 배경이 있다. 일제는 1911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 회원을 무더기로 체포한 뒤 최종적으로 105명을 유죄로 조작해 기소했다. 이른바 ‘105인 사건’이다. 일제는 조사 과정에서 4명이 고통스러운 고문으로 사망하고 3명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일 정도로 잔인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105인 사건’에서는 특히 평안북도 사람들이 희생을 크게 치렀다. ‘전체 피검자 105명 중 정주 출신이 44명(41.9%)으로 가장 많았고, 선천 23명(21.9%)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 아픈 유산은 이곳 주민들의 뇌리 속에 오랜 응어리로 전승되어 오고 있었다.’(선우훈의 ‘민족의 수난: 105인 사건의 진상’)

선천 사람들은 한 집만 건너도 친지이자 지인이 되는 이들이 부당하고도 가혹하게 탄압을 받았던 사실을 기억에서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로부터 9년 후, 3·1운동은 그들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던 저항의 심지에 불꽃을 댕겼다.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목사 양전백이 대표적인 인물. 선천의 기독교계 지도자인 그는 105인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 후 또다시 3·1운동에 깊숙이 개입했다.

일제는 선천의 이 같은 정서를 모르지 않았다. 항상 요시찰 대상 지역으로 주목해 왔다. 선천 일대(강계, 의주 포함)에 대대 규모의 정규군을 배치하는 동시에 헌병경찰, 압록강 연변의 국경수비대, 필요하면 소방대까지 동원하곤 했다. 정규군이 아닌 이들은 소요 사건이 생기면 진화용 갈고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개 일본 본토에서 넘어온 가고시마(鹿兒島) 출신 불량배들이었다.(강덕상의 ‘현대사 자료·조선 3·1운동’ 편)

가고시마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악연이 깊은 땅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조선인들의 코를 무자비하게 칼로 베어 가고, 부녀자들을 노예로 붙잡아 가고, 도공을 납치하는 등 온갖 악행을 자행한 왜군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근거지였다.(안영배,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일제가 3·1운동이 선천에서 전개되자마자 총칼부터 앞세워 진압하려 했던 데는 이런 배경도 이유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체포된 이들에 대해 잔인한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신성학교 학생 10명은 온갖 악형을 받은 끝에 병원에 실려 갔는데, 매질에 의한 장독(杖毒)이 이미 배 속으로 들어가 치료 7일 만에 3명이 죽고 6명은 폐인이 됐다.(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그러나 일제의 강경책은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3월 1일 이후 평안북도 지역에서 벌어진 시위 중 선천이 가장 격렬했고 지속적이었으며 규모도 압도적이었다. 고종의 인산일(조선시대 왕과 왕비, 왕세자 등의 장례일)인 3월 3일 천도교도와 기독교도의 선도로 1500여 명이 봉기한 데 이어, 선천읍 장날인 3월 4일에는 무려 1만 명(일본 측 기록 6000명)이 들고일어나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군이 총검으로 찔러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3월 5일 신미도 운종면에서는 도민이 총궐기해 대대적인 독립만세 운동을 벌인 다음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접수해 20일 동안이나 독립 자치행정을 실시했다.(이병헌의 ‘3·1운동비사’)

○ 일제의 기만 술책

일제가 평화적 독립만세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폭력을 조장한 일도 있었다. 3·1운동 첫날 평양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평양 주재 선교사들이 직접 목격한 것을 비밀리에 보고서로 작성해 놓았다. 서양인 선교사들의 ‘3·1운동 발발보고서(Korean Independence Outbreak Beginning March 1st, 1919)’에 의하면, 평양 장대현교회 옆 숭덕학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처음에는 평화롭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숭덕학교 운동장은 3000명(실제 1000여 명 추정)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고종황제 붕어 추념식(봉도회)을 한다는 명분으로 기독교 장로파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식을 진행했다. 이들은 만세운동에서 지켜야 할 점을 설명했다. ‘불법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모두 주어진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헌에게 저항하지 말고, 일본인 관리나 민간인들을 해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행사를 염탐하러 온 일제의 사복 차림 형사들도 듣고 있었다.

만세 삼창을 끝으로 행사를 마치고 거리 시위에 들어갔다. 숭덕학교와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종이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구속되어 1000년을 살기보다 자유를 얻어 100년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는 김선두 목사의 연설에 열광한 군중은 가두로 나섰다. 이때 남산현교회에서 출발한 감리파 시위대와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출발한 천도교 시위대가 합류했다. 세 갈래로 나뉘어 시내를 행진하는 시가 행렬은 태극기 물결로 장관을 이뤘다.

평양의 만세운동은 한국인들의 감동적인 잔치무대였다. 시위대가 숭덕학교를 출발해 서문 거리를 지나 형무소 쪽으로 방향을 돌릴 때, 숭실전문학교의 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백은 최재화 목사의 생애’) 장엄한 애국가와 벅찬 태극기 물결 속에서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일본인이 직접 관리하고 가르친 보통학교 생도(학생)들도 거리로 나가 만세를 불렀다. 한 일본인 교사가 “우리가 오리 새끼를 키워 물에 놓아주었구나. 10년간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허사로 돌아갔다”고 탄식했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

그런데 일경은 시위대 기세가 거세지자 태도를 바꾸었다. 마구잡이로 잡아가 경찰서에 가두기 시작했다. 여학생을 비롯해 여염집 부녀자들도 두들겨 맞은 뒤 기절한 상태로 끌려갔다. 격분한 시위대가 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 관리들을 꾸짖으며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그러지 않을 거면 시위대 모두를 잡아 가두라고 소리쳤다. 일경은 아랑곳없이 소방대까지 동원해 소방용 호스로 군중에게 물을 뿌렸다. 일부 한국인 경찰들은 호스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경찰복을 벗어 던진 채 군중에 합세까지 했다.(‘3·1운동 발발보고서’)

당황한 일경은 기만 술책까지 동원했다. 일본인들에게 한복을 입혀 변장시킨 뒤 시위대에 섞여 들어가도록 했다. 경찰서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린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를 핑계로 무력 진압에 나섰다. 수십 차례 총을 발포해 수많은 군중이 부상당했다. 밤이 되자 일경은 더욱 악독하게 나왔다. 소방대로 하여금 무차별적으로 쇠갈고리를 휘두르게 하여 거리에서 사람들을 난자했다. 3월 1일 시위가 마무리된 이후 평양의 시위 지도부들은 모조리 일경에 붙잡혀 갔다.

3·1운동은 그야말로 한국인들의 비폭력 평화 운동이었다. 3·1운동 초기, 만세운동에 참여한 한국인들은 민족대표들의 당부를 끝까지 지키려 애썼다. 반면 일제는 일본인을 한국인으로 가장하는 기만책을 통해 한국인이 폭력 사건을 일으킨 것처럼 꾸며 총칼로 진압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일제의 3·1운동 탄압은 외국인들에 의해 전 세계에 폭로되고 만다.

3·1운동은 무장 투쟁이 아닌 비폭력 저항이었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전 세계인들에게 더욱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3·1운동으로 일제의 단단한 철옹성은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 北 “김형직, 조선국민회 주도” 주장하나 “주역 장일환” 증언 많아 ▼

북한 김일성家는 3·1운동에 참여했나


조선국민회 결성 100주년을 기념하는 중앙보고회를 소개한 북한 노동신문(2017년 3월 23일자 1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이 단체를 결성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1894∼1926)이 키워낸 애국지사와 청년 학생들이 3·1 봉기에 앞장섰다고 주장한다. 김형직이 3·1운동의 실제 주역이자 배후이며 김일성도 여덟 살에 평양 보통문 반일 시위에 참가했다고 한다.

북한은 김형직을 3·1운동의 배후 주역으로 내세우는 근거로 ‘조선국민회’라는 국내 비밀 결사단체를 제시한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 3월 평양에서 결성된 뒤 1918년 2월 일제에 의해 해체돼 1년이 채 안 되게 존속했다. 북한은 김형직이 이 단체를 주도적으로 결성했고 이 단체의 중요 인물들이 평양 등지에서 3·1운동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인민문화궁전에서 결성 100돌 기념행사도 가졌다.

사실은 어떠할까. 조선국민회는 20, 30대의 평양 숭실학교 출신 청년들이 주도해 결성한 결사단체임은 분명하다. 권총을 의미하는 ‘돼지다리’라는 암호를 사용해가며 무기를 구입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 하와이의 박용만 조직과 연계해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을 전국에 알리는 일도 했다.(강영심의 ‘조선국민회 연구’)

그런데 조선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가 김형직이라는 증거는 안 보이고 다른 이가 주역이었다는 증언이 많다. 조선국민회의 핵심 간부였던 배민수는 “숭실고 건물에 모여 ‘대한국민회 조선지부’를 조직했다. 나의 친구 장일환이 회장이었고 백세빈은 외국통신원, 나(배민수)는 서기와 통신부장을 겸했다. 조직원은 30명으로 모두 믿을 만한 숭실학교 친구들이었다”고 회고했다.(‘배민수 자서전’)

장일환이 실제적 지도자였다는 것은 일제의 평안남도 경무부장이 회원 25명을 체포한 후 작성한 조사자료(秘密結社發見處分件, 秘受3725號)에도 나온다. 이 문건에서 언급한 중요 인물 순서에서 김형직은 장일환, 백세빈, 배민수에 이어 네 번째로 등장한다.

강영심 연구원(이화사학연구소)에 따르면, 김형직은 조선국민회 사건 이후 중강진으로 이사한 뒤 1925년 중국 지린(吉林)성으로 옮겨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계 백산무사단과 연계해 활동하다 이듬해 사망했다.

북한은 3·1운동에 김형직, 김일성 부자가 참여했다고 주장하면서도 3·1운동은 혁명에 실패한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33인 민족대표가 주도한 성공적인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보고 있다. 남북의 시각이 완전히 엇갈린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3·1운동#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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