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엘’ 세 바퀴로 달려야 진정한 강국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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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서울올림픽 30돌]<3·끝> ‘스포츠 선진국’의 조건

세계적인 배드민턴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박주봉 일본 대표팀 감독(54)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남다른 추억이 있다. 그는 당시 시범종목이었던 배드민턴 남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를 끝으로 은퇴하려다 세계 최고 무대인 서울 올림픽 때 황홀한 경험을 잊지 못해 선수 생활을 연장하게 됐어요.”

박 감독은 배드민턴이 정식종목이 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남자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며 ‘셔틀콕 대통령’이란 찬사를 들었다.

자신의 셔틀콕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서울 올림픽 30주년을 맞아 그는 가슴 한구석에 무거운 감정도 느낀다. 15년째 일본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그에게 최근 한국 스포츠의 침체가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저는 일본에 체력을 중시하는 한국식 훈련 과정을 접목시킨 게 효과를 봤죠. 하지만 장기 합숙 등 수십 년째 답습하고 있는 한국의 트레이닝 방식은 달라져야 합니다. 게다가 저변이 열악하다 보니 대형 선수 나오기가 점점 힘들어요.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체육이 급하게 통합되다 보니 양쪽 모두 혼란을 겪고 있는 듯합니다.”

한국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에서 24년 만에 종합 2위 자리를 일본에 내주고 3위가 됐다. 앞서 한국이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합작한 메달은 21개다. 소련 등 동구권이 보이콧한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19개) 이후 가장 적었다.

한국 스포츠의 국제경쟁력 저하를 막기 위한 본질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육상 수영 등 기초종목은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양궁 태권도 사격 등 전통적인 강세 종목에선 경쟁국의 도전이 거세다.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학교 및 생활체육도 우려스럽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체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측정한 20대 초반 성인 남녀의 유연성, 상대근력, 순발력은 1989년보다 모두 나빠진 것으로 나왔다. 특히 20대 초반 남자의 유연성은 38.9%, 상대근력은 15.9% 줄었다.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성봉주 박사는 “체력 저하는 학교 체육시간이 줄어든 영향도 크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체육계 전반에서 감지되고 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30년 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은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이제 선진국형 스포츠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일본과 영국은 학교 및 생활체육 등 풀뿌리 스포츠를 기반으로 한 엘리트 스포츠 부활의 모범 사례로 삼을 만하다. 생활체육에 치중하던 일본은 2020년 도쿄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2015년 스포츠청까지 신설해 엘리트 스포츠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조사에 따르면 일본은 2016년 경기력 향상 지원 및 연구개발 등에 약 1000억 원을 투자했다. 영국은 해마다 1800억 원을 엘리트 스포츠에 투자하고 있으며 별도로 생활체육에 연간 3000억 원을 투입해 유소년과 청소년 스포츠 활성화에 사용하고 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36위였던 영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4위, 2012년 런던 올림픽 3위에 이어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2위까지 끌어올렸다. 일본은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6위에 올라 한국(8위)을 추월했다.

서울대 체육교육과 김기한 교수는 “체육에 대한 패러다임이 생활체육으로 전환됐더라도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투자는 지속돼야 한다. 이를 통해 쌍방향 촉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일본 문부과학성 조사에 따르면 중고교 운동부에 소속된 선수는 전체 학생의 60%가 넘는다. 중고교 운동부를 합하면 20만 개 가까이 되고 거기에 속한 학생은 700만 명을 웃돈다. 일본 대학에서는 최소 2년 동안 교양체육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반면 문체부 조사 결과 국내 초중고교 운동선수는 2009년 8만9661명에서 지난해 5만7757명으로 34%나 감소했다. 한국과 일본의 학교 운동부 체제가 다르긴 해도 학생들의 스포츠 참여도에서 한일 양국은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얘기다. 일본 쓰쿠바대 홍성찬 교수는 “일본은 이미 평생 스포츠 개념이 뿌리를 내린 지 오래”라고 전했다. 곽대희 미시간대 교수는 “국민 개개인이 스포츠 향유를 통해 얻는 즐거움이나 행복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체육회는 지난해 말 스포츠 선진국을 향한 백년대계로 ‘어젠다 2020’을 제시하고 생애주기별 체육 활동 지원, 스포츠 경쟁력 강화, 학교 체육 활성화 등을 추진 과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2022년까지 전국 시군구에 지역 스포츠클럽을 245개 만들어 학교 체육, 엘리트 스포츠와의 연계를 꾀하고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할 계획이다. 체육계에서 늘 끊이지 않는 폭력 및 인권 침해도 사라져야 한다.

학교 체육 활성화를 위해선 0교시, 방과 후, 자유학기제 등 학교 특성에 맞는 스포츠 활동 장려와 체력장 부활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성봉주 박사는 “초등학교 체육에서 육상을 필수 프로그램으로 하면 기초체력이 향상될 뿐 아니라 다른 종목으로 전이하는 데도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동아일보는 30년 전 서울 올림픽 폐막 직후 ‘즐기면서 하는 운동’ 활성화, 비정상적인 학교 체육과 부진한 사회 체육 정상화 및 내실화 등의 내용을 향후 과제로 보도했다. 한국 스포츠의 시계는 어쩌면 ‘88 시절’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박인비 김연경 이용대 기보배 등 1988년에 태어난 88둥이들은 월드스타로 활약하고 있다. 서울 올림픽 이후 높아진 한국 스포츠의 위상도 이들의 성장에 자양분이 됐다. 30년 뒤 이들이 환갑을 맞을 무렵 “세상 좋아졌다”는 말이 나오게 하려면 서울 올림픽 30번째 생일이 그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해묵은 문제 인식에서 벗어나 실천이 필요한 때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88서울올림픽#스포츠 국제경쟁력#생활체육#대한체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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