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서영아]헤이세이의 종언, 떠나는 이의 염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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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 도쿄 특파원
서영아 도쿄 특파원
내년 4월 말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생전 퇴위를 앞두고, 일본의 이번 세밑은 한 시대의 막을 내리는 분위기로 가득하다. 헤이세이(平成·1989∼2019년) 시대의 종언이다.

전쟁의 참화로 얼룩졌던 아버지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쇼와(昭和·1926∼1989년) 시대에 대한 뼈저린 반성에서 시작된 헤이세이는 아키히토 일왕의 재임 기간을 뜻한다. 동시에 현재 만 30세 미만 젊은이 세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쇼와 태생’이라면 30세 이상, 헤이세이 태생이라면 그 아래 세대가 된다.

가수 아무로 나미에의 은퇴나 국민 만화 ‘마루코는 아홉 살’의 작가 사쿠라 모모코의 별세 등 헤이세이 시대를 풍미한 주인공들의 퇴장 소식에 일본인들은 ‘헤이세이가 끝난다’고 되뇌곤 했다. 패전 이후 73년이 지나면서 일본의 전후를 이끌어온 각계 명사들의 부고도 매일같이 들려온다. 이들 원로가 남긴 말 중에는 반드시 ‘전쟁 반대’가 있다.

세밑이면 한 해를 마감하는 기획들을 내보내던 매스미디어는 올해는 30년 단위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각종 기획물을 쏟아내고 있다. 23일 공개된 아키히토 일왕의 85세 생일 기념 기자회견도 화제가 됐다. 퇴임 전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그는 여러 차례 목이 메어 평화와 반전(反戰)에 거는 마음을 술회했다. 발언은 시종일관 ‘우경화하는 일본과 아베 정권’을 견제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화제가 됐다.

“앞의 전쟁에서 많은 인명을 잃었고 우리나라의 전후 평화와 번영이 이 같은 많은 희생과 국민의 노력에 의해 쌓였다는 것을 잊지 않고… 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이를 올바로 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헤이세이가 전쟁이 없는 시대로 끝나려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안도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나 난징대학살 등 전쟁범죄를 가리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하면서 역사 교육에 대한 개입도 강화해 왔다. 이 점에서 일왕이 역사를 단순히 ‘전한다’고 하지 않고 “올바로 전한다”고 표현한 것은 아베식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반격으로 해석됐다.

영국의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비해 전후의 일왕은 천황(天皇·하늘의 황제)이라는 칭호와 달리 ‘군림하지도 통치하지도 않는’, 단순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 점에서 아키히토 일왕의 ‘역사 올바로 전하기’ 같은 발언은 자칫 정치 개입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일종의 파격이다. 평화 반전 포용에 대한 그의 열망이 그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이런 그의 인기는 놀라울 정도여서 23일 일반인 축하 방문객은 즉위 이후 가장 많은 8만3000명을 기록했다.

기자는 2019년 1월 말로 두 번째 특파원 임기를 마친다. 그동안 일본도 많이 변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를 양산하며 보통국가로 향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지만 과거 일본의 특징이던 정중함이나 세심함, 겸허함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그저 바쁘고 거칠어져 가는 일본을 만나게 된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탓에, 각자 고립돼 저마다의 늙음과 고독,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공포가 전 사회를 짓누르고 있기도 하다.

기자 개인적으로는 평화와 포용의 나라에 대한 일왕의 염원이 일본 국민에게 공감되고 있는 헤이세이의 끝자락에 일본을 떠나게 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시대의 마감을 지켜보면서 일본이 더 각박해지지 않기를, 헤이세이의 평화가 계속되기를 희망해 본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아베 정권#히로히토일왕#헤이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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