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명건]‘등 돌린 세상’ 합창한 판사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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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건 사회부장
이명건 사회부장
‘이 세상이 차갑게 등을 보여도/눈부신 사람아 난 너를 사랑해/널 세상이 볼 수 있게 날아 저 멀리.’

지난달 13일 대법원 청사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울려 퍼진 노래 가사 일부다. 판사와 법원 일반 직원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불렀다. 노래는 스키점프 선수들의 애환을 다룬 영화 ‘국가대표’의 OST ‘버터플라이’다.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극복하고 꿈을 실현하도록 용기를 북돋우는 내용이다. 마치 딱 지금 법원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노래 같다. 재판 거래 의혹으로 궁지에 몰린 처지에서 벗어나 사법부의 위상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들린다.

이 행사는 70년 전 사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사법권을 이양받아 출범한 날을 기려 열렸다. 사람으로 치면 고희연(古稀宴)이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물론이고 문재인 대통령과 문무일 검찰총장도 참석했다. 그런 경사에서 ‘차갑게 등 돌린 세상’을 합창할 정도로 사법부의 위기의식은 심각하다.

행사 준비 과정에서 합창단이 ‘국민을 위한 사법부가 되겠다’는 취지의 구호를 외치는 방안이 논의됐다. 일종의 자정선언을 하려던 것이다. 찬반 의견이 엇갈렸다. 반대 논리 중 한 가지는 “사법부 자정선언을 행정부 수장인 문 대통령 앞에서 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합창단원들의 투표 결과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다. 과거 청와대와의 재판 거래 의혹으로 ‘사법부 독립을 스스로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 대통령 앞 자정선언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의혹에 연루된 전·현직 판사들을 수사 중인 검찰총장 앞이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이렇듯 판사들의 심경은 복잡다단하다. 재판 거래 의혹 사건의 영장 대거 기각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내심 인정하면서도 겉으로 못 드러내고 속을 끓이는 판사도 적지 않다. 따라야 할 양심과 지키고 싶은 권위, 어쩔 수 없는 현실과 피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만나면 한숨이고, 모이면 홧술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요즘 서울고법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선후배, 동료들이 검찰에 줄줄이 불려가 조사를 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한숨’짓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김 대법원장에 대한 야속함이 ‘홧술’을 부른다는 것이다. 앞서 6월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은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한 수사 의뢰나 촉구를 반대했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은 수사 협조 방침을 밝혔고, 검찰 수사가 본격화됐다.

당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수사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던 소장 판사들은 지금도 입장에 변화가 없다. 그러나 이들도 속이 쓰리다. 김 대법원장도 그렇게 보인다. 과거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며 현재 법원까지 불신의 늪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고법 부장판사건 소장 판사건 모든 판사가 괴롭기는 매한가지다. 대다수는 올바른 판결을 하기 위해 잠자고 밥 먹는 시간까지 아끼며 애쓰다 난데없는 재판 거래 의혹에 뒤통수를 맞았다. 그 분노와 실망이 반목을 부추겼고 무기력을 양산했다. 그리고 검찰 수사는 판사들이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었다. 이게 현 사법부 위기의 본질이다.

위기 타개는 김 대법원장의 몫이다. 그는 이달 말 전국 30여 개 법원 순회 방문을 시작한다. 소통의 성과를 거두려면 ‘과거 탓’과 ‘편 가르기’부터 멈춰야 한다. 김 대법원장도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장을 지내지 않았나. 그래야 ‘나를 양 전 대법원장 편으로 의심하는 것 아닌가’ 우려하는 판사들도 사법부 신뢰 회복에 동참할 수 있다. 가리지 않고 보듬는 대법원장의 넓은 가슴만이 판사들의 방황을 끝낼 수 있다.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
#대법원#사법부 70주년#양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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