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응 자제하고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 1년만에 원상회복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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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中 경제보복… 2012년 영토갈등때 日은 어떻게 이겨냈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반도 배치 결정에 따른 중국의 패권주의적 대응은 2010년과 2012년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영유권을 둘러싸고 극단으로 치달았던 중일 갈등을 떠올리게 한다. 외교안보 갈등을 경제·문화 보복으로 푸는 중국의 거친 대응은 일본이 한국보다 먼저 뼈저리게 겪었다. 일본은 이 사태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中이 경제 방아쇠 당기면 日은 20년 후퇴할 것”

“일본인인가. 내려라. 태우고 싶지 않다.”

2012년 9월 상하이(上海)에서 화장품회사 영업을 담당하던 40대 일본인 남성은 타고 가던 택시에서 쫓겨났다. 걸려온 휴대전화를 ‘모시모시(여보세요)’라며 받는 소리를 택시 운전사가 들었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이나 선술집에서 일본인이란 이유로 얻어맞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다른 주재원은 중국인이 “일본인이냐”고 물으면 “아니, 한국인이다”라고 답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일본이 2012년 9월 11일 센카쿠 국유화를 완료하자 중국에서 반일감정이 폭발했다.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댜오위다오를 일본이 일방적으로 국가 소유로 전환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는 “중국이 경제 방아쇠를 당기면 일본은 20년 후퇴할 것”이라고 엄중 경고했다. 이 경고는 즉각 실현되는 듯했다. 베이징(北京)에서는 시위대가 일본대사관 진입을 시도했고, 중국 도시 110곳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 일부는 폭도화했다. 산둥(山東) 성 칭다오(靑島)에서는 시위대가 파나소닉 공장 등 일본 기업 공장 10곳에 난입해 불을 지르고 생산라인을 파괴했다. 도요타자동차 매장도 불에 탔다. 후난(湖南) 성 창사(長沙)에선 일본 백화점 헤이와도(平和堂)가 약탈당해 10억 엔(현재 환율로 약 100억 원)의 피해를 입었다. 장쑤(江蘇) 성 쑤저우(蘇州) 시위대 수천 명은 일본계 음식점 40곳에 난입해 문과 유리창을 부쉈다.

당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은 한 달간 일본 기업이 입은 손실을 수십억∼100억 엔(수백억∼1000억 원)으로 산정했다. 불매운동 등의 간접적 영향을 제외하고, 시위대의 물리적인 파괴 행위로 인한 직접적 영향만 따진 것이다.

반일감정 확산으로 인한 피해는 훨씬 컸다. 도요타 닛산 혼다자동차의 중국 판매량이 한 달 만에 절반으로 떨어졌다. 현지 자동차 공장들은 가동률을 줄이고 일본에서 생산된 완성차 수입을 수개월간 중단해야 했다. 일본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이 2012년 10월 전년 동월 대비 60%, 11월 71% 줄면서 관광업계가 초토화됐다.

2012년은 중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중국은 그해 9월 23일 일본에 40주년 기념식 무기 연기를 통보했다. ‘정랭경열’(政冷經熱·정치는 차갑지만 경제는 뜨겁다)을 자랑하던 중일관계는 순식간에 ‘정랭경랭’(政冷經冷·정치도 경제도 차갑다)으로 바뀌었다.

2010년 제1차 센카쿠 사태

일본은 이보다 꼭 2년 전에도 중국과 부딪쳐 피를 본 경험이 있었다. 2010년 9월 7일 센카쿠 인근에서 조업하던 중국 어선이 일본 해양순시선을 들이받자 일본은 어선을 나포하고 선장과 선원을 체포했다.

닷새 뒤인 12일 중국은 니와 우이치로(丹羽宇一郞) 주중 일본대사를 소환해 항의했다. 다음 날 일본은 선원 14명을 석방했지만 선장은 억류했다. 그러자 중국은 14일 리젠궈(李建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부위원장의 일본 방문 계획을 취소했고 18일에는 베이징, 상하이 등에서 대규모 반일시위가 벌어졌다. 19일 일본 법원이 중국인 선장 구속을 10일 연장한다고 발표하자 중국은 각료급 이상 교류 중단 조치를 발표했다.

중국의 결정타는 21일 나왔다.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막아버리자 일본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희토류는 첨단산업의 필수재료로 당시 일본은 그 대부분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 법원은 24일 중국인 선장의 석방을 발표했다.

일본은 이후 희토류 수입원을 동남아시아와 몽골 등으로 다변화했고, 희토류 없는 제품 개발에 힘을 기울이는 등 기술혁신의 전기로 삼았다. 여기엔 중국이 또다시 희토류 카드를 꺼내 들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

센카쿠를 둘러싼 중일 힘겨루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양국의 경제·문화 교류는 2차 센카쿠 사태 1년여 만인 2013년에 사실상 원상회복됐다.

아베노믹스로 엔화가 약세를 유지하면서 일본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은 2012년 143만 명에서 지난해 637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들의 ‘폭매(暴買)’ 덕에 일본 경기도 활성화됐다. 도요타 닛산 등 일본 6대 자동차 회사의 중국 내 신차 판매는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400만 대를 돌파했다.

일본은 중국의 보복에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인내심을 유지했다. 또한 민간 차원에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동시에 수출 대상국을 다변화했다. 특히 중국 리스크를 절감한 기업들은 중국 외에 동남아 거점을 하나 더 만든다는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에 돌입했다. 닛산자동차는 센카쿠 사태 두 달 뒤인 2012년 11월 태국에 110억 밧(현재 환율로 약 3500억 원)을 투입해 새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달 도요타도 인도네시아 생산 시설을 2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일본의 대중 직접투자는 2012년 73억8000만 달러(현재 환율로 약 8조5000억 원)에서 2015년 32억1000만 달러(약 3조7000억 원)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2012년 홍콩에 이어 대중 투자액이 2위였던 일본은 2015년 싱가포르, 대만, 한국보다 낮은 5위가 됐다. 반면 같은 기간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아세안 주요 4개국에 대한 직접투자는 64억 달러(약 7조4000억 원)에서 116억 달러(약 13조3000억 원)로 2배 가까이로 늘었다. 일본의 투자가 줄고 일본계 기업이 중국에서 창출하는 일자리도 감소하자 중국 정부도 점차 태도를 바꿨다.

대단원은 2014년 베이징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2년 반 만에 열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었다. 두 정상은 전략적 호혜관계를 지속 발전시키자는 데 동의했다.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2015년 중국을 방문한 일중경제협회 대표단에 “일본의 대중(對中) 투자와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을 위한 환경 정비를 지시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과 일본의 다른 점

중국이 정치적 이유로 경제·문화 보복을 가하는 것은 올해 한국을 겨냥한 사드 보복과 2012년 일본을 상대로 한 센카쿠 사태가 유사하지만 다른 점도 적지 않다.

센카쿠 사태는 근본적으로 영토 문제였다는 점에서 일본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한목소리를 냈다. 2012년 12월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해 아베 총리가 집권했지만 이후로도 민주당 정권이 취했던 노선을 바꾸지 않았다. 사드 배치를 놓고 둘로 갈라진 한국과는 달리 일본 언론은 한결같이 정부 입장을 지지했다.

한국 경제의 대외 무역 의존도가 일본보다 크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의 무역 의존도는 2015년 기준 69.9%로 일본(30.9%)의 두 배가 넘는다. 중국 전문가 노구치 도슈(野口東秀) 다쿠쇼쿠(拓殖)대 객원교수는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리한 처지이고 경제의 중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며 “안보에서 미국·일본과 확실하게 협력하고 경제는 중국 의존도를 줄여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도쿄=서영아 sya@donga.com·장원재 특파원
#사드#중국 경제보복#센카쿠 사태#중국 의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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