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전성철]적폐청산이 지겨워진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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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사회부 차장
전성철 사회부 차장
누군가 말을 꺼낼 때가 됐다 싶었다. 결국 문무일 검찰총장이 입을 열었다. 문 총장은 17일 대검찰청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적폐청산’ 수사 관련 시한을 정해놓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빨리 마치는 걸 목표로 내부적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수사가 길어지면 피로감이 커질 수 있으므로 수사팀 숫자를 늘려 최대한 빨리 사건을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검찰 안팎에는 전 정권과 전전 정권을 겨냥한 지루한 적폐청산 수사에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적폐청산 수사에 싫증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난 것은 근본적으로 검찰 수사 범위가 무한정 확대되는 모양새 때문이다. 검찰은 이미 국가정보원 문서고에서 찾아낸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각종 의혹을 수사 중이다. 최근 들어서는 검찰과 특검 수사, 재판이 모두 끝난 ‘BBK 주가조작’ 사건도 수사 대상으로 거론된다. 국정농단 사건 수사가 본격화한 것은 작년 이즈음이다. 좋은 노래도 계속 들으면 질리는데 특정 정권 수사가 1년 넘게 이어지니 지겨운 건 당연하다.

문재인 정부가 검찰에 수사를 요청한 전 정권의 각종 적폐 중에는 국민 눈높이에서 ‘저런 것도 꼭 수사를 해야 하나’ 싶은 내용이 많다. 이처럼 수사 필요성에 대한 공감도가 떨어진 점도 피로감의 한 가지 이유다.


우리는 그동안 ‘공직자 범죄=뇌물 범죄’라는 등식을 익숙하게 받아들여 왔다. 검은돈을 받은 공직자는 감옥에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돈 문제가 아닌 기타 잘못은 징계를 받거나 공직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검찰이 ‘최순실 씨가 받은 돈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느냐’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 전 대통령을 뇌물죄로 구속 기소한 데에는 그런 정서적 배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전 정권의 적폐 중에는 그런 뇌물 사건은 거의 없다. 돈을 받지 않았다고 잘못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국정원이 정부에 비판적인 연예인의 평판을 깎아내리려 우스꽝스러운 나체 사진을 합성해 유포했다거나 전 정권을 깎아내리기 위해 음습한 공작을 했다면 그건 당연히 큰 잘못이다.

그러나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이 이미 구속된 상황에서 당시 실무 담당 직원들을 구속하거나 재판에 세우는 것은 가혹한 측면이 있다. 검찰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6월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한 뒤 원 전 원장만 기소했다. 지시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걸로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그 나름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정권이 바뀌었다고 법 적용 기준을 바꾸는 건 명분이 없다. 이런 식이어서는 검찰은 잠시 박수는 받을지언정 진정한 신뢰를 받기 힘들다.

청와대가 적폐청산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모습도 피로감의 한 원인이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12일 긴급브리핑에서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 최초 보고시간을 사후 조작한 정황이 담긴 문건을 발견했다고 공개한 일은 대표적인 사례다. 해당 문건이 왜 긴급한 현안인지, 비서실장이 직접 브리핑할 일인지 쉽게 이해가 안 간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기한 연장을 앞두고 법원을 압박하려는 시위라는 의심을 받는 이유다.

정부가 적폐청산에 지나치게 매달리다 보니 ‘적폐청산 말고는 잘할 수 있는 게 없나 보다’ 하는 비아냥거림이 나온다. 현 상황에 하루빨리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전성철 사회부 차장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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