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응급환자 경중, 구급대원이 이송때 판단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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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분류법 이르면 상반기 도입

이르면 올 상반기부터 119 구급대원이 응급환자의 상태를 판단해 가장 적합한 응급실로 이송하는 시스템이 도입된다. 현재 응급실에서 활용 중인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도구(KTAS)’를 개편해 이송 단계부터 확대 운영하는 것이다. 응급환자가 병원을 옮겨 다니다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를 줄이고, 대학병원과 같은 상급병원 응급실에 경증환자가 몰리는 ‘응급실 과밀화’를 막기 위한 조치다. 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 오랫동안 고민해온 신속한 응급의료 체계의 첫 단계가 실현되는 셈이다.

12일 소방청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병원 이송 단계에서 응급환자의 경중을 구분해 가장 적합한 병원으로 안내하는 시스템을 권역별로 도입하기 위해 조만간 시범운영 지역을 선정할 계획이다.

이 시스템이 활성화되면 응급환자가 치료 가능한 병원을 찾아 전원(轉院)하는 비율을 줄여 생존율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19 구급대의 응급환자 부적정 이송률(2015년 보건복지부 자료)은 △중증외상 환자 44.6% △뇌신경계질환 환자 31.9% △심혈관계질환 환자 30.7%에 이른다. 응급환자 10명 중 3, 4명이 적합한 응급실로 이송되지 않아 응급처치 시기를 놓친 셈이다. 이 시스템 개발에 참여한 박준범 순천향대 응급의학과 교수는 “최초 응급기관을 잘 선택하면 병원을 옮기는 불필요한 시간을 줄여 환자 생존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환자를 최적의 병원으로 보내면 한정된 의료 자원의 효율성도 높아진다. 현재 국내 응급실은 이용자의 70% 이상이 비(非)응급환자에 해당하는 4, 5등급에 속한다. 응급실 문턱이 낮다 보니 정작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일본과 캐나다 등 의료 선진국에선 이미 병원 이송 전 응급환자 분류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번에 도입하는 응급환자 분류 시스템은 대한응급의학회가 일본 오사카시에서 운영하는 응급환자 분류 애플리케이션(앱) ‘오리온(ORION)’을 참조해 만들었다. 구급대원의 태블릿PC에 응급환자 분류 앱을 설치하면 가장 먼저 환자의 병력과 혈압, 심장박동수, 체온 등 생체정보를 입력하게 돼 있다. 이를 통해 최상위 응급의료기관인 구급구명센터로 이송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이어 호흡과 통증, 출혈 상태 등을 따져 응급처치나 시술이 가능한 병원을 알려준다. 응급실별 과밀 여부도 이 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일선 구급대원들은 이 시스템 도입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방청 관계자는 “적정 병원이 10km 떨어져 있다고 나올 때 장시간 이송하는 도중에 생명 유지 조치를 계속해야 하는데 응급구조사의 업무 범위에는 여전히 제약이 많다”고 말했다. 위급한 환자를 경증환자로 잘못 판단해 환자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다. 박 교수는 이런 우려에 대해 “이 앱을 사용하면 구급대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적어 오히려 안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상급 의료기관을 선호하는 환자와 구급대원이 갈등을 빚을 가능성도 있다. 조석주 부산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환자가 끝까지 상급병원을 고집할 경우 의사의 판단을 구하는 과정을 거치면 마찰을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박재찬 복지부 응급의료과장은 “구급대원의 판단을 신뢰하는 국민의 의식 변화가 선행돼야 이 시스템을 정착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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