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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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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추상미가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

EDITOR 이혜민 기자

2018. 11. 12

2009년 드라마 ‘시티홀’을 끝으로 연기 활동을 중단했던 추상미가 묵직한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들고 돌아왔다. 그사이 엄마가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그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천5백 명의 북한 전쟁고아들이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내진다. 북한이 폴란드에 아이들의 돌봄을 요청한 것이다. 시골의 작은 양육 기관에서 아이들과 폴란드 교사들은 곧 언어를 뛰어넘어 가족이 된다. 하지만 8년 뒤 아이들은 북한의 송환 요청에 따라 전원 귀국하게 되고, 폴란드 교사들은 아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다큐멘터리 속 폴란드 교사들은 지금도 아이들 생각에 눈물을 흘린다.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배우 추상미(45)의 감독 데뷔작으로, 폴란드 교사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근원을 찾아가는 한편 탈북민 아이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탈북 소녀 이송과 함께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위대한 사랑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여정을 그린 이 다큐멘터리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 초청작’에 선정되었다. 10월 말 개봉을 앞두고 배우 아닌 감독 추상미로 우리 앞에 나타난 그를 만났다.

배우 아닌 감독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반갑습니다. 

영화 연출은 오랜 꿈이었어요. 2009년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 들어가서 영화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그사이 단편영화 ‘분장실’(2010) ‘영향 아래의 여자’(2013) 2편을 만들었는데, 각각 전주국제영화제 단편 경쟁부문과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한국단편 경쟁 부문에 진출했어요. 2011년 아이를 출산하며 대학원을 휴학한 뒤에는 장편영화 소재를 계속 찾았습니다(2007년 뮤지컬 배우 이석준과 결혼한 그는 2011년 아들을 낳았다). 

감독으로 데뷔한 소감은요. 

내가 만드는 이야기에 세상이 공감해줄까 궁금했어요. 혼자서 작업을 하다 보니 불안했죠. 물론 남편이 모니터링을 많이 해줬지만 긴장됐어요. 이번에 영화 시사회를 몇 차례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어요. 좋은 피드백을 많이 받았거든요.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2014년 후배가 일하는 출판사에 갔다가 우연히 접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이 실화를 소재로 극영화를 개발하기 시작했어요. 먼저 사실들을 하나씩 모아갔죠. 폴란드 언론인 욜란타 크리소바타가 이 실화를 바탕으로 3년간 취재해 소설 ‘천사의 날개’를 썼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한국인 연구자도 계시더군요. 정흥보 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산학협력중점 교수님은 MBC 기자 시절인 1980년대부터 이 소재에 대해 조사하셨고, 폴란드 브로츠와프대학 한국학과 이해성 교수님도 학계에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알리셨더라고요. 저는 이분들이 찾은 사실에 살을 붙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죠.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만든 이유가 있나요. 

원래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로 준비했어요. 시나리오도 그렇게 썼고 배우들 오디션도 봤고요. 그런데 폴란드 현지를 둘러보고 생존자를 인터뷰하면서 다큐멘터리로 방향을 바꿨어요. 시사성이 높은 이야기인 데다가 그 폴란드 선생님들이 80대, 90대로 연세가 너무 많으셨기 때문에 ‘이분들의 생생한 육성,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극영화를 접고 새로 다큐멘터리를 기획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여정 자체를 담았죠. 

폴란드에서 들은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다면요.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요제프 보로비에츠(93) 프와코비체 양육원 원장님이 “아이들이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그 아이들은 까만 머리와 까만 눈에 생전 처음 보는 동양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머나먼 타국의 아이들이 아니라 내 유년 시절의 일부 같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커리큘럼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엄마 아빠가 필요하다는 걸 직감하고 교사들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도록 했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면서 “제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삶을 돌아봤을 때 가장 잘한 일, 가장 만족스러운 일이 고아들을 돌봤던 것 같습니다”라고 하셨어요. 이 말씀이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컷.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컷.

작품을 완성하고 나니 기분이 어떠세요. 

생각해보면 (저는 제 자신)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기중심성이 있었는데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세상에 해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폴란드 선생님들도 본인이 겪은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있었지만 결국 그 상처 때문에 북한 아이들을 모성과 부성으로 품어주신 거잖아요. 그러면서 이 시대에는 모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상을 향해 모성을 발휘할 때 좋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길 수 있는지 느꼈습니다.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나요. 제작비 마련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4년 정도 걸렸죠. 소재를 찾은 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1년 반 정도 시나리오를 썼어요. 촬영은 한국과 폴란드에서 2016년 9월부터 11월까지 했죠. 나머지 기간에는 편집과 같은 후반 작업에 힘을 쏟았어요. 집에서 혼자 다 했는데, 내레이션 녹음도 제 휴대전화로 했어요. 제작비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통일과 나눔 재단에서 각각 1억원씩 지원받았고요. 물론 사비도 들어갔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업에만 몰두했던 저를 남편이 묵묵히 응원해줘서 고마웠어요. 

남북 관계가 호전되고 있어 ‘폴란드로 보내졌던 전쟁고아들의 북송 이후’를 추적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런 이야기를 담은 후속 편을 만들 생각은 없나요. 

방송사에 그 공을 넘길래요(웃음). 실제로 한 방송사가 이후를 알아보는 중인데 방송사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더라고요. 폴란드로 보내진 전쟁고아 출신 탈북자의 존재를 금방 찾아내셨더라고요. 아쉽게도 그분은 지난해 암으로 별세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폴란드 이민을 준비하셨대요. ‘고향은 태어난 곳만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준 사람이 있는 곳, 그런 기억이 있는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시사회 때 “고등학생 시절 영어 선생님이 폴란드로 보내진 전쟁고아였다”라고 증언해준 분도 계셨는데 작품이 개봉되면 그분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들려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 구상을 시작할 무렵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굉장히 심했어요. 아이가 잘못되는 악몽을 매일같이 꿨고요. 그 두려움 때문에 아이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했죠. 불안정한 모성이 안정된 모성으로 갈 때까지 과도기를 겪은 거예요. 그러다 우연히 북한 꽃제비(먹을 것을 찾아 일정한 거주지 없이 떠돌아다니는 북한의 어린아이들을 지칭하는 은어) 영상을 봤는데, 눈물이 막 나더라고요. ‘저 아이 엄마는 어디에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아이가 우리 아이같이 보였죠. 관심이 내 아이로만 국한돼 있다가 다른 아이들로 옮겨간 거죠. 이즈음 폴란드로 보내진 전쟁고아에 대한 실화를 알게 됐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 끌렸나 봐요. 

아이를 키우면서 작업하기가 녹록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아이보다 정치가 더 큰 문제였어요(웃음). 남북 관계나 북미 관계가 좋지 않을 땐 과연 이 다큐멘터리를 공개할 수 있을까 싶어서 걱정이 됐거든요. 아이를 키우면서 이런 일을 하는 게 힘들었지만 기다림의 열매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이의 존재 자체가 큰 힘이 됐어요. 저와 하도 영화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눠서 아이가 이제는 전문 용어를 섞어가며 말해요. “엄마 하드(외장하드)는 언제 갖다 줄 거야, 편집은 어디까지 마쳤어, 사운드는 어때….” 폴란드로 보내진 북한 고아들과 저희 아이가 비슷한 나이니까 그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 더 많이 생겼습니다. 

아이도 이런 엄마를 뿌듯하게 여길 것 같아요. 


일하느라 아들과 많이 놀아주지 못해 가슴 아픈데 돌이켜보면 저희 아버지도 일하느라 가정을 잘 돌보지 못하셨어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아버지(고 추송웅, 1941~1985)가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친 예술가였다”라는 이야기를 듣거든요. 부모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이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작을 경험해보니 배우와 감독은 어떤 점이 다르던가요. 

예술의 본질은 같다고 생각해요. 작품의 주제를 분석해내서 어떤 결과물을 내보내야 하죠. 하지만 배우와 감독의 역할은 좀 다른 것 같아요. 배우로 임할 때는 그 역할로 변하기 위해서 외부적인 것들을 끊고 혼자서 침잠했던 시간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감독은 세상을 보는 시선이 자유롭게 열려 있어야 하고, 사회 이슈에도 민감해야 하잖아요. 그래서인지 감독으로 일할 때는 타인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본인은 전쟁고아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오빠 추상록 씨는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 ‘소리굽쇠’(2014)를 만들었는데, 남매가 사회적인 영화를 연출한 배경이 뭘까요. 


저희 아버지가 1970년대에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원작으로 자유에 대해 다룬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올렸는데 많은 학생들이 와서 봤다고 해요. 아마 그 학생들에겐 ‘빨간 피터의 고백’ 무대를 관람하는 것도 거리로 나가서 시위하는 것처럼 저항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아버지가 쓰신 일지를 보니 ‘좋은 예술 작품 하나가 분노를 멈추게 하고 성찰을 하게 만든다’라는 글이 적혀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그 이후로 예술가의 사회적 기여를 고민하며 전국 대학 강당을 돌면서 공연을 하셨어요. 저희도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나요. 

저는 상처를 조명하는 관점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어요. 폴란드 선생님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로 개인과 역사의 상처를 안고 있는 분들인데 다른 민족의 아이들을 품는 것으로 그것을 치유하셨죠. ‘개개인이 겪은 시련들이 굉장히 선하게 사용될 수 있다’라는 믿음, 이 메시지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위안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디자인 최정미 사진제공 언니네홍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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