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3

2017.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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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統一言重千金 (문통일언중천금)

‘가야사 복원’ 한마디 언급에 해당 지자체, 사학계까지 ‘들썩’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7-06-16 15:5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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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과제는 대통령 재임 5년 동안 정부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계획표다. 국정과제를 어느 부처가 담당할지, 언제 어떻게 달성할지에 대한 구체적 실행 계획을 담고 있다. 국정과제는 대선 때 공약을 토대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에서 1차로 경중을 가리고 대통령 취임 후 부처 간 검토와 조정을 거쳐 최종안을 확정, 발표한다.

    당선과 동시에 임기를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은 인수위를 대신해 국정기획자문위원회(국정기획위)를 꾸려 국정기조와 추진 전략, 국정과제 등을 가다듬고 있다. 김진표 국정기획위 위원장은 5월 23일 “문재인 대통령 대선 공약 201개를 100여 개 국정과제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5월 140개 국정과제를 발표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의 발언대로라면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에 비해 국정과제가 40개 이상 줄어들 전망이다.



    T.P.O 어긋난 가야사 언급

    국정과제를 대폭 줄이겠다는 김 위원장 발언이 있은 후 문 대통령은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고대사 가운데 삼국사 전의 역사가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특히 가야사는 신라사에 덮여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국정기획위가 국정과제를 정리하면서 가야사 부분을 꼭 포함시켜달라”고 주문했다.

    국정기획위는 부처 업무보고를 받고 자체 논의를 거쳐 6월 말까지 100대 국정과제를 정해 7월 초 문 대통령에게 보고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직접 “가야사 부분을 국정과제에 꼭 포함시켜달라”고 주문하자 ‘가야사 복원’이 국정과제로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하지만 효율적인 마케팅에 필요하다는 T(Time·시간), P(Place·장소), O(Occasion·상황) 관점에서 따져보면 이것이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국정기획위가 100대 국정과제를 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언급이 나왔다는, 시점(Time)상 문제가 있다. 국정기획위의 논의를 거쳐 국정과제를 추리기 전에 대통령이 먼저 언급함으로써 사실상 국정과제가 결정됐다는 점에서다. 물론 시급한 국정 현안은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직접 의제를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가야사 문제로 대통령이 감 내라 배 내라 하는 것으로 비치면 시스템에 의한 국정운영에 회의론이 싹틀 수 있다.

    두 번째 논란은 가야사 복원을 언급한 장소(Place)가 적절했느냐는 점이다. 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에 포함시켜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면, 수석보좌관회의보다 실제 국정과제를 논의 중인 국정기획위원들과 간담회 자리를 마련해 그 같은 뜻을 밝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수 있다.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한 인사는 “대통령의 말은 내용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얘기하느냐 하는 형식”이라며 “대통령의 말을 수행할 사람에게 직접 하면 오해나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만약 대리인을 통해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면 그 대리인이 ‘실세’라는 소리가 나오게 된다”고 말했다. 이번 가야사 복원 관련 발언을 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국정기획위원보다 수석보좌관들의 위상이 한층 올라간 측면이 있다.

    또 첫 조각을 위한 장관들의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둔 시점에 가야사 복원을 불쑥 끄집어낸 것 역시 상황(Occasion)에 걸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 대통령 스스로도 ‘뜬금없다’고 전제했을 정도다. 참여정부 때 문 대통령과 함께 일했던 한 인사는 “문 대통령의 평소 업무 스타일로 봤을 때 사회적 논란을 예상하고 가야사 복원을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이번 기회에 한번 제대로 다뤄보자는 뜻에서 가볍게 문제제기를 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국정과제라고 하니까 크게 이슈가 됐는데, ‘가야사에도 관심을 기울이자’는 정도로 언급했다면 지금처럼 논란이 커지지는 않았을 터”라고 덧붙였다.



    대통령 관심 사항의 위력

    가야사 복원과 관련 있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지자체) 등에서는 가야사 복원을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처럼 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발언을 계기로 ‘예산 지원’을 기대하고 있다. 경남 김해시와 경남도 등 지자체에서는 김해를 가야사 역사문화도시로 지정하겠다는 방침이다. 1000억 원 이상 예산을 들여 가야사 2단계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2000억 원 예산으로 가야 왕궁을 복원하며, 230억 원을 들여 고인류박물관을 건립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 밖에도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가야를 주제로 한 여행상품도 개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가야사 복원을 매개로 한 각종 사업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과거 청와대에 근무했던 인사들은 “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로 먼저 언급하는 바람에 가야사는 여러 국정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대통령 주요 관심 사항’으로 격상됐다”며 “가야사 복원을 앞세우면 예산 배정이나 인력 지원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란 시그널이 공직사회에 퍼지게 됐다”고 우려했다.

    이명박 정부 때 ‘녹색성장’이나 박근혜 정부 때 ‘창조경제’처럼 가야사를 앞세우면 다른 국정과제보다 우선적으로 추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청와대 출신 한 인사는 “국정과제로 선정되면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청와대가 관리하는 프로젝트라는 인식이 생겨 부처 간 협력이 용이한 측면이 있다”며 “진행 상황을 정기적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예산과 인력 지원 등이 상대적으로 수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에 대해 ‘예산을 깎자’거나 ‘인력을 줄여야 한다’고 반기를 들 공무원이 없다는 점에서다.

    국회에 계류 중인 ‘가야문화권 개발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도 급물살을 탈 것이란 전망이 많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이완영 의원은 자유한국당 소속이다. 더불어민주당 등 여당 의원이 대통령의 뜻을 좇아 법안 제정을 지지하면 법안 통과가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국회 한 관계자는 “국회에 계류된 수많은 법안 가운데 대통령이 법 통과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먼저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다만 국회에서 법 통과는 대통령 의지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여야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4국시대에 대한 기대감

    사학계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언급을 계기로 3국시대가 4국시대로 확대될 가능성에 기대감을 표하고 있다. 발해사 연구를 바탕으로 통일신라시대가 남북국시대로 바뀌었듯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중심의 역사가 가야사 복원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4국시대로 정립될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야기 가야사’(청아출판사)의 저자 김경복 씨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역사 인식이 바뀌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또 그렇게 바뀔 것 같지도 않지만, 그동안 소홀하게 취급돼오던 우리 역사의 일부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염불보다 잿밥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인 하일식 연세대 교수는 6월 4일 학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대통령의 가야사 연구, 복원 지시가 부적절한 이유’라는 글을 올렸다. 하 교수는 ‘대통령이 역사의 특정 시기나 분야의 연구나 복원을 지시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가야사 연구에 조예가 깊은 한 연구자도 “대통령 말 한마디에 가야사가 지나치게 부각되는 현 상황은 진정한 가야사 복원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며 “오랜 기간 학술적 성과가 쌓여야 할 가야사 복원 문제가 대통령 임기 안에 실적을 내야 할 사업처럼 비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던 우리 역사 연구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역사 복원에 정치적 의도를 담으면 목표가 정해져 제2의 국정교과서 논란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6월 1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가야사를 경남 중심으로 경북까지만 미친 역사로 생각하는데, 사실 더 넓고 섬진강 주변 광양만과 순천만, 심지어 남원 일대까지 맞물리고 금강 상류 유역까지 유적들이 남아 있다”며 “그렇게 넓었던 만큼 가야사 복원은 영호남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라면서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인데 국정기획위가 놓치면 다시 과제로 삼기 어려울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충분히 반영되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에 대해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며 국정과제로 선정돼야 할 이유까지 언급한 것이다. 정치권 일각에서 “가야사 복원 사업의 결과로 영호남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은 몰라도, 영호남의 벽을 허물려고 가야사 복원에 나서겠다는 것은 역사를 정치에 활용하겠다는 뜻과 뭐가 다르냐”고 반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추진한 것을 두고 거센 비판이 제기된 이유는 아버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재조명 목적이 있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언급 역시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으로 비치면서 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가야’ 출신 정치인 전성시대?‘가야사 복원’ 사업의 원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해 김씨인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가야사 복원 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예산 1290억 원을 들여 경남 김해시 대성동 고분군 등의 문화재 발굴과 복원 사업을 진행한 것. 하지만 고분군 주변에 위치한 학교의 이전 문제 등이 걸림돌로 작용해 2단계 사업은 2006년 이후 사실상 중단됐다. 김 전 대통령은 가야사 복원을 ‘영호남 화합’ 사업으로 여겼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김 전 대통령이 동서화합에 도움이 되는 사업이라며 적극 독려했다”면서 “정권 실세였던 박지원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역할도 컸다”고 말했다.

    김해시는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언급을 계기로 2단계 복원 사업 추진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내년 새해 예산안에 문 대통령이 언급한 가야사 복원 예산이 얼마나 편성될지 주목하는 이가 많다. 문화재 발굴을 위해 토지 보상 명목으로 현금성 예산이 대거 투입되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김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고 자란 봉하마을이 있고, 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인 더불어민주당(민주당) 김경수 의원의 지역구가 있기도 하다. 또 박원순 서울시장과 민주당 박영선 의원도 경남 창녕이 고향으로 모두 가야권 출신 인사다.

    가야는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 중에도 잠시 화제에 올랐다. 이 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가 김해 김씨라는 이유에서다. 이 전 대통령 재임 3년 차이던 2010년 1월 26일 인도공화국 선포 60주년을 맞아 이 전 대통령 부부는 인도 뉴델리 대통령궁 앞에서 있었던 훈장 수여식과 군사퍼레이드를 참관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청와대는 ‘2000년 세월을 뛰어넘는 양국의 인연’이란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김 여사가 고대 가락국의 시조대왕인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 왕실의 공주 허황옥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고대 인도 왕실과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내용이었다. 김 여사의 인도 방문 이후 한 방송사에서는 가야를 주제로 한 대하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했다.

    이 밖에 경남 합천 출신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경남 창녕 출신으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를 지낸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 역시 가야 중심지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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