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4

2017.04.19

한창호의 시네+아트

마이클 래드퍼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

정치 영화에 빛나는 서정성

  • 영화평론가 hans427@daum.net

    입력2017-04-17 17: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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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국내에서 20여 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우편배달부 역을 맡은 배우 마시모 트로이지는 원래 연출과 연기를 병행했다. 그는 난니 모레티, 로베르토 베니니와 더불어 1980년대 ‘이탈리아의 신세대 트로이카’ 가운데 1명이었다. 이들은 당시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이었고, 정치 변혁에 열정적이었다.

    모레티와 베니니는 기대에 부응해 이후 유명 감독이 됐지만, 트로이지는 요절하는 바람에 잊히고 말았다. 트로이지의 마지막 작품이 ‘일 포스티노’(1994)다. 그는 이 영화의 촬영이 끝난 직후 개봉을 보지 못한 채 지병인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불과 41세였다. 하지만 ‘일 포스티노’는 ‘백조의 노래’가 돼 관객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았다.




    ‘일 포스티노’의 연출자는 영국인 감독 마이클 래드퍼드라고 소개되지만, 사실은 트로이지가 공동으로 연출에 관여했다. ‘일 포스티노’의 지리적 배경이 이탈리아 나폴리 앞 조그만 섬이고, 트로이지는 나폴리를 대표하는 영화인이었다.

    트로이지가 건강상 이유로 단독 연출을 할 수 없었다. ‘일 포스티노’는 진보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 대한 헌정의 성격이 강한 작품인데, 이는 네루다를 향한 청년 트로이지의 흠모가 옮겨진 것이다.



    ‘일 포스티노’는 시인이자 좌파 정치인이던 네루다의 유럽 망명 생활에서 모티프를 따온 픽션이다. 칠레 공산당 소속 상원의원이던 네루다는 정부의 공산당 탄압을 피해 유럽을 떠돌기 시작했다. 시인은 1952년 나폴리 앞의 유명한 섬 카프리에 잠시 머물었는데, 영화는 그 시기를 배경으로 허구의 섬을 내세워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촬영지는 나폴리 앞 프로치다 섬이다. 71년 노벨문학상을 받는 네루다가 이 섬에서 겨우 글자를 읽는 우편배달부이자 어부의 아들 마리오(트로이지 분)를 만나 언어의 아름다움을 전한다는 내용이다.



    마리오는 시인으로부터 ‘은유’를, 또 파도처럼 밀려오는 언어의 ‘리듬’을 배운다.

    의사소통 도구로만 여기던 언어가 그 자체에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마리오는 이내 언어와 사랑에 빠진다.

    말에 대한 사랑은 여인을 향한 사랑으로, 또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발전한다. 그렇게 네루다의 삶이 우편배달부의 일상으로 조금씩 이식된다.

    마리오는 베아트리체(마리아 그라치아 쿠치노타 분)라는 처녀를 만나 단테와 베아트리체처럼 순수한 사랑을 나누고, 이웃 어부들의 착취당하는 삶에 눈을 뜬다.

    네루다는 그에게 탄부들의 지옥 같은 삶에 관한 시집 ‘모두의 노래’(문학과지성사)를 왜 썼는지 설명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일 포스티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외피를 입고 있다. 사회적 의식이 거의 없던 어부의 아들이 시를 통해 예술을 배우고, 네루다처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른바 ‘의식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물론 그런 정치적 의도는 뒷면에 가려져 있다. 그 대신 스크린엔 언어의 아름다움과 사랑하는 사람의 맑은 마음이 나폴리의 푸른 바다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정치영화의 남다른 서정성이 관객의 마음을 휘어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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