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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5 03:00: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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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도 못 막은 ‘머리치장’… “조선 여성은 능동적”

궁중 ‘가체’ 민간에 크게 유행 영-정조 때 금지령도 효과 없어


조선 후기 풍속화가 신윤복의 ‘미인도’(18세기 말∼19세기 중반). 당시 기녀들에게 보편화됐던 ‘높은 머리’를 보여 준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근검과 금욕에 가치를 부여한 조선 후기 유교사회에서 여성의 치장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이런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여성의 머리치장이 크게 유행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3일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이 대구 인터불고호텔에서 연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 횡단하는 생활사’에서 논문 ‘18세기 조선 여성의 머리치장 유행과 신분 과시’를 통해 “머리치장을 놓고 벌인 조정과 여성들 사이의 싸움을 추적한 결과 조선 여성이 수동적이지만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머리치장의 중심에는 남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부분 가발 ‘다리(月子)’가 있었다. 정 연구원은 “궁중의 가체(加체·가발)가 17세기 후반 무렵 퍼지면서 다리를 이용한 머리치장이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며 “정조 때에는 다리를 제대로 올리는 비용이 황소 1마리 가격에 맞먹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비쌌다”고 밝혔다.

머리치장이 사치로 이어지자 왕이 나서 규제하게 된다. 첫 시도는 조선 영조 32년(1756)에 있었다. 영조는 사대부가 여성의 가체를 금하고 그 대신 머리 뒤로 쪽을 지어 족두리를 사용하라고 명했다. 1757, 1758, 1762년에도 비슷한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 조치는 결실을 보지 못했다. 여성들이 족두리에 온갖 치장을 하는 것으로 높은 머리를 하지 못하던 욕망을 대신 채웠다. 영조는 1763년 높은 머리는 허용하되 남의 머리를 이용하는 다리만 금지시키는 것으로 한발 물러섰다.

여성의 머리치장에 대한 금령은 정조로 이어졌다. 값비싼 다리를 마련할 수 없어 혼인 후 6, 7년이 지나도록 시부모 보는 예를 거행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다리 수요가 줄어들지 않았다. 정조는 1788년 ‘가체신금사목(加체申禁事目)’이라는 시행규칙을 만들어 배포했다. 이번에는 사대부가 여성뿐만 아니라 전 여성이 대상이었다. 가체신금사목은 누구라도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도 표기했다. 사족이나 부녀자들은 높게 머리를 얹는 게 금지됐고,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기녀와 무수리 등 하층민은 다리만 금지시켰다. 그러나 양반가나 여염집 구분 없이 자기 머리로 높은 머리를 쌓는 풍조는 사라지지 않았고, 쪽진 머리로 바꾸더라도 쪽을 지은 뒷머리를 높게 하는 풍조도 생겨났다. 19세기에 와서야 여성들의 머리는 보통의 쪽진 머리로 변모했지만 사대부가에서 하는 작은 다리나 여염집에서 혼인할 때 하는 성대한 머리 장식은 다 없어지지 않았다.

정 연구원은 “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없는 처지에서 보인 이런 ‘작은 저항’은 18세기 여성들이 자기 문제에 능동적으로 처신했고 사회적 잣대나 가치관에 밀려 자신의 욕구를 일방적으로 없애버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계층별로 연구 중인 영남문화연구원이 주최한 이 대회에는 영국 출신 사회인류학자 프란체스카 브레이 교수를 비롯해 프랑스 미국 중국 일본의 학자 12명도 참석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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