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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동아/9월 22일]‘장군의 아들’, 국회에 x물을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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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동아/9월 22일]‘장군의 아들’, 국회에 x물을 뿌리다

황규인 기자 입력 2017-09-21 16:27수정 2017-09-2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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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국회 제14차 회의에서 연설 중인 김두한 의원(오른쪽). 동아일보DB
단언컨대 국회 회의록 어디에도 이보다 ‘섹시한’ 한 줄은 없다. 누구나 한번쯤 위정자들을 향해 내뱉고 싶었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던 그 말. 어쩌면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1918~72·당시 한국독립당)이 아니었다면 국회 본회의에서 감히 외칠 수 없던 말. 그 말은 바로….

국회 회의록 검색 시스템에서 찾은 1966년 9월 22일 본회의 회의록 28페이지.

그리고 김 의원은 정말 정일권 국무총리(1917~94),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16~77·한국일보 사주) 등을 향해 똥물을 뿌렸다. 1966년 9월 22일, 나중에 역사가들이 ‘국회 오물투척사건’이라고 이름 붙인 순간이었다.

김 의원이 국회에서 오물을 뿌리는 장면을 전한 당시 동아일보. 이 사건은 SBS 연속극 ‘야인시대’를 비롯해 김 의원을 다룬 작품에 여러 차례 등장했다. 이 때문에 옛날 일인데도 젊은 세대에게 익숙한 편. 이런 이유로 젊은 세대는 김 의원에게 ‘커리(카레) 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따르면 김 의원은 똥을 양철통에 담은 뒤 마분지로 포장해 이를 들고 이날 오후 12시 45분경 질문자로 단상에 올랐다. 그 후 1시 5분경 “부정과 불의를 합리화시켜준 장관들을 심판하겠다”며 단상 앞에 나와 포장지를 풀었다. 그러면서 “이것은 밀수 사카린인데 국무위원들에게 맛을 보여줘야겠다”며 포장지 위에 있던 흰가루를 국무위원들에게 뿌리고 이어 똥을 뿌렸다.

이 마지막 발언에 김 의원이 똥을 준비한 이유가 드러난다. 바로 ‘밀수 사카린’이다. 당시 삼성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공업은 그해 5월 흔히 설탕 원료로 쓰는 사카린(새커린)을 일본에서 밀수하려다 덜미가 잡혔다. 새커린 2259포대(약 55t)를 건설 자재로 꾸미려다 들통이 난 것.

삼성이 일본 미쓰이(三井) 그룹과 밀수를 공모했다고 보도한 1966년 10월 5일자 동아일보

당시 박정희 정권은 밀수를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과 유착 관계였던 군사정권은 밀수품을 압수하고 벌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사태를 정리하려 했다. 그러자 국회에서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을 통과시키며 조사에 나섰다. 김 의원이 똥을 뿌린 건 대정부 질문 이틀째였다.

김 의원은 사건 다음날 자택을 찾아간 동아일보 기자에게 “내가 던진 오물은 내각 국무위원 개인에게 던진 게 아니라 헌정을 중단했고 밀수 사건을 비호하고 있는 제3 공화국 정권에 던진 것”이라며 “문제의 오물은 순국선열의 얼이 서린 파고다 공원(현 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퍼낸 것”이라고 했다.

사건 이튿날인 1966년 9월 23일 취재진과 만나 인터뷰 중인 김두한 의원

충격이 컸던 만큼 효과도 확실했다. 정부에서는 정 총리를 비롯한 내각이 총사퇴했고,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도 한국비료와 대구대를 국가에 헌납하면서 은퇴를 선언했다. (다만 이 회장은 2년 뒤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동아일보 만평 ‘고바우 영감’은 이 만평 10주년 기념 지면(1969년 12월 30일자)에서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적군 일개 대대를 섬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한 위력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 의원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국회의원 자리를 잃고 서대문형무소에 구속·수감됐다. 형무소에서 할복 소동을 벌이기도 했던 그는 1년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후 두 번 다시 ‘금배지’를 달지 못한 채 1972년 숨을 거뒀다. 공교롭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1972년 11월 21일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 날이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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