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사막 250km… 산악 24시간… 길 아닌 길 달리는 나는 자유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극한에 도전하는 사람들

정현강 씨가 6월에 열린 ‘2017 고비사막 마라톤 대회’ 첫날 모래언덕을 오르고 있다. 제1구간은 36km 코스였다. 정 씨는 “초반이라 덜 지쳤을 때인데도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언덕은 정말 힘들었다. 빠르게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정현강 씨 제공
정현강 씨가 6월에 열린 ‘2017 고비사막 마라톤 대회’ 첫날 모래언덕을 오르고 있다. 제1구간은 36km 코스였다. 정 씨는 “초반이라 덜 지쳤을 때인데도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언덕은 정말 힘들었다. 빠르게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정현강 씨 제공
“완주의 순간보다는 출발선에 섰을 때 가슴이 더 벅찼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내가 사막을 달린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어요.”(정현강 씨·22)

“어릴 때부터 좋아한 경관이 사막이었어요. 커서 마라톤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생각해 보니 두 개를 합치면 ‘사막 마라톤’이더라고요. 꼭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정송강 씨·25)

정송강, 현강 남매는 6월 18일부터 24일까지 열린 ‘2017 고비사막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20세기 초 이곳을 횡단하고 그 경험을 글로 남긴 유럽의 여성 탐험가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시작됐다는 이 대회는 매년 코스가 바뀌지만 7일 동안 250km를 걷고 달린다. 총 6개 구간이 있는데 마라톤 풀코스와 같은 거리의 42.195km 코스, 마지막 이틀 동안 잠을 자지 않고 80km를 주파하는 코스는 반드시 포함된다. 중국과 몽골에 걸쳐 있는 고비사막, 칠레 아타카마사막, 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 그리고 남극까지 포함하면 그랜드슬램이라고 부르는 ‘4대 극지 마라톤’이 완성된다. 누나 송강 씨와 동생 현강 씨가 사막 마라톤에 참가한 것은 처음이었다. “해병대 전역을 앞두고 올해 1월 말 마지막 휴가를 나왔는데 누나가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더라고요. 듣자마자 ‘이거다’ 싶었어요.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강해지고 싶어 무언가에 도전하고 싶었거든요.”(현강 씨)

“사막 마라톤 얘기를 꺼냈을 때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동생이에요. 다들 ‘멋지다’고 호응하면서도 결국은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했거든요. 해보기 전에는 절대 이 매력을 모를 거예요.”(송강 씨)

해병대에서 한 구보가 달려본 전부였다는 대학생 동생은 처음 도전한 사막 마라톤에서 완주에 성공했다. 마지막 80km 구간은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 속에서 26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열사병 증세에 꼬박 3시간을 누워 있어야 했고, 11kg이 넘는 배낭을 멘 채 졸면서 걷기도 했지만 끝까지 레이스를 마쳤다. 몸무게는 일주일 만에 6kg이 줄었다. 700만 원에 육박하는 참가비를 마련하기 위해 4개월 동안 하루에 10시간 이상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현강 씨는 “부모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와 달라고 하지 그랬느냐”는 질문에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면 아예 도전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학창 시절부터 몇 차례 하프 마라톤을 뛰어봤다는 취업준비생 누나는 완주를 하지는 못했다. 3구간을 달리다 누군가가 건넨 마유(馬乳)를 먹은 게 탈이 났다. 대회 주최 측에서는 송강 씨를 진단한 뒤 뛰지 못하게 했다. 그 상태로는 발작을 일으켜 사망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송강 씨는 그 뒤 자원봉사자로 레이스를 함께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며 정해진 체크 포인트에서 참가자들에게 물을 제공하고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며 응원을 했다는 송강 씨는 “매 순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너무 좋았다. 9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24시간 달리기에 참가한 뒤 10월에 아타카마사막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같은 길도 다른 느낌” 트레일 러닝

‘시티 트레일’ 참가자들이 섭씨 30도가 넘는 날씨에 남산 정상을 향해 출발하고 있다. 이날은 ‘친목’ 차원에서 마련한 7km의 짧은 코스라 복장이 가볍지만 총 250km에 달하는 사막 마라톤을 할 때는 침낭, 식량, 서바이벌 키트, 구급 도구 등 30여 가지 필수품을 담은 무게 11kg 이상의 백팩을 짊어져야 한다. 안철민 기자
‘시티 트레일’ 참가자들이 섭씨 30도가 넘는 날씨에 남산 정상을 향해 출발하고 있다. 이날은 ‘친목’ 차원에서 마련한 7km의 짧은 코스라 복장이 가볍지만 총 250km에 달하는 사막 마라톤을 할 때는 침낭, 식량, 서바이벌 키트, 구급 도구 등 30여 가지 필수품을 담은 무게 11kg 이상의 백팩을 짊어져야 한다. 안철민 기자
1일 오후 7시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5번 출구.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저녁인데도 기온은 섭씨 32도.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산에서 뛰려고 온 사람들이다. 6월에 처음 시작해 3회째를 맞은 이 행사의 이름은 ‘시티 트레일’. 도시에서 트레일 러닝을 즐기기 위해 마련됐다. 남산을 기반으로 코스는 매번 바뀌었는데 이날은 장충체육관 뒤 성곽길에서 출발해 정상을 거치고 남산도서관으로 들어오는 약 7km 거리였다. 정송강, 현강 남매도 참가했다. 현강 씨는 “고비사막을 뛰고 났더니 이런 코스는 귀엽게 느껴진다”며 웃었다.

트레일 러닝은 트레일(trail·자취, 흔적, 산길)과 러닝(running)을 합친 말로 포장된 도로가 아닌 길을 달리는 것을 일컫는다. 국제트레일러닝협회(ITRA)에서는 ‘모든 자연환경을 달리는 활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런엑스런의 유지성 대표(46)는 “과거에는 산악 달리기, 사막 마라톤, 어드벤처 레이싱 등 상황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 2012년 ITRA가 출범하면서 트레일 러닝이라는 용어가 자리를 잡았다”고 얘기했다.

유 대표는 명실상부한 국내 트레일 러닝의 선구자다. 2002년 4월 사하라사막 마라톤 대회에 처음 출전한 뒤 사막 마라톤 정보를 제공하는 한국어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사막 마라톤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트레일 러닝에 빠져 직업이던 건축설계사도 그만둔 뒤 사막 마라톤만 30차례 뛰었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4대 극지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2차례 달성했다. 동호인들 사이에서 ‘대장님’으로 불리는 유 대표는 “호기심이 생겨 그냥 놀러갔다가 직업이 됐다.(웃음) 내가 깨달은 트레일 러닝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다. 달리기를 통해 많은 곳에 가고, 많은 사람을 만나 다양한 세상을 자유롭게 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 대표가 길라잡이로 나선 뒤 사막 마라톤을 경험한 사람이 크게 늘었다. 그중에는 ‘전체 몇 등으로 완주했다’는 이들도 꽤 있다. 하지만 유 대표는 “기록을 의식하면 즐거움이 덜할 수 있다”며 “처음 사막 대회에 나갔을 때 한 외국인이 출발과 동시에 휙∼ 하고 저만치 앞서 가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12분대에 뛰는 ‘프로’였다.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 경쟁을 할 수 있나. 기록은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오후 7시 40분. 참가자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애초 참가 신청자는 200명에 육박했지만 추첨을 통해 40명을 추렸다. 유 대표는 “이 행사는 공식 대회와는 다르다. 트레일 러닝을 처음 하는 사람들도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체험 기회’ ‘미끼 상품’ 같은 것이다. 끝나고 뒤풀이도 있기 때문에 참가자가 많으면 핸들링이 안 된다. 4월에 경기 동두천에서 주최한 ITRA 인증 대회 ‘제3회 코리아 50K’는 풀코스 59km와 단축 코스 10km를 합해 참가자가 1100명이 넘었다”고 설명했다.

오후 8시가 넘어서면서 남산은 어둠에 싸였다. 참가자들이 착용한 헤드 랜턴의 움직임이 마치 반딧불이의 행렬 같다. 오후 8시 25분이 지나 첫 완주자가 나왔다. 45분57초 만에 레이스를 마친 김동민 씨(34)는 “대장님은 재미있게 뛰라고 했는데 오늘은 기록을 좀 내보고 싶어서 초반부터 세게 달렸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난해 9월 마라톤에 입문했고 한 달 뒤 트레일 러닝도 시작했다는 김 씨는 “오늘 코스는 너무 좋았다. 마라톤과 트레일 러닝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면 후자다. 같은 코스가 뛸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 어제와 오늘이, 비 올 때와 안 올 때가 다르다. 무엇보다 힘들게 오른 산이나 언덕을 내려가는 재미가 너무 좋다”고 말했다.

출발한 지 1시간 25분이 지나 레이스가 끝났다. 모두 완주한 참가자들은 서로를 축하하며 활짝 웃었다. 남산도서관을 지나던 시민들이 한여름 밤에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거리는 이들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다단계’ 통해 중독된 극한의 즐거움

최근 고비사막 마라톤대회에 다녀왔던 정송강(앞쪽), 현강(가운데) 남매가 1일 서울 남산을 오르내린 ‘시티트레일’ 참가에 앞서 출발지인 장충체육관 뒤 성곽길에서 달리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맨 뒤는 국내 트레일 러닝의 선구자이자 이날 행사를 주최한 런엑스런의 유지성 대표.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최근 고비사막 마라톤대회에 다녀왔던 정송강(앞쪽), 현강(가운데) 남매가 1일 서울 남산을 오르내린 ‘시티트레일’ 참가에 앞서 출발지인 장충체육관 뒤 성곽길에서 달리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맨 뒤는 국내 트레일 러닝의 선구자이자 이날 행사를 주최한 런엑스런의 유지성 대표.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레이스를 마친 참가자들과 행사 스태프들은 인근의 호프집으로 향했다. 이들은 치킨 한 조각으로 허기를 달래고, 맥주 한 잔으로 더위를 식히며 트레일 러닝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베테랑들의 경험담에 초보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 대표는 이를 ‘다단계 과정의 하나’라고 표현했다. “일단 발을 들여 놓으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제갈혜화 씨(43)는 원래 등산과 마라톤을 즐겨 했지만 지금은 2년 전에 시작한 트레일 러닝에 푹 빠져 있다. 여러 대회에서 마주치다 보니 런엑스런 스태프들과는 막역한 사이가 됐다. 이날은 자원봉사자로 시설을 설치·철거하고 참가자들의 기록을 적었다. 김동민 씨처럼 트레일 러닝의 가장 큰 매력이 “내려가는 재미에 있다”고 한 제갈 씨는 고향인 충북 충주에도 걸어간 적이 있다고 했다.

역시 자원봉사자로 대회에 나온 김영일 씨(44)는 4년 전 겨울 “아무것도 모른 채” 30km가량을 달리는 태백 대회에 참가했다가 트레일 러닝의 ‘덫’에 걸렸다. “진짜 힘들었는데 끝나고 나니 다음 대회를 찾게 되더라”는 그는 “이왕 시작한 거 사막에 가고 싶다. 꼭 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장지윤 씨(41)는 아트 디렉터로 일하다 2012년에 사하라사막 250km를 완주한 뒤 아예 트레일 러닝 대회 기획자로 변신해 2015년부터는 ITRA 국제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망설임 없이 “자연과 함께해서”를 트레일 러닝의 매력으로 꼽은 장 씨는 “사막을 달리면 심오한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막상 해보니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더라. 바람 한 점이 정말 고맙다는 느낌, 그게 좋았다”고 했다.

앳된 외모의 김채울 씨(24)는 이 바닥의 ‘고수’다. 5월에 끝난 ‘2017 사하라사막 마라톤 대회’에 최연소로 참가해 250km를 완주했다. 대회를 앞두고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금한 700여만 원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에 전액 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씨는 3년 전 ‘은총이와 함께하는 철인 3종 대회’에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철인 3종을 시작했고 트레일 러닝에까지 발을 디뎠다. 김 씨는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는 박은총 군(14)이 중증 장애인 친구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철인 3종에 도전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사막 마라톤을 통해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라톤을 즐기다 지난해 트레일 러닝을 시작했다는 김진영 씨(26)가 “이건 마약이에요.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어요”라고 하자 김채울 씨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마약에 손대면 인생을 망치는 것처럼 이것도 그래요. 사막에 한 번 가려면 망했다 싶을 정도로 돈이 많이 들거든요(웃음). 혼자 망할 수는 없으니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야죠. 하하.”

흔히 사막 마라톤을 설명할 때는 극한(極限), 극기(克己)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하지만 사막 마라톤을 다녀온 사람들은 ‘즐거움과 자연’을 이야기했다. ‘극한의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정현강 씨는 이런 말을 했다. “사막 마라톤 관련 사진과 영상을 처음 본 순간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내 가슴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 참가를 결심했어요.”

‘극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는 쉬지 않고 이어졌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이들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밝았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사막 마라톤#고비사막 마라톤 대회#트레일 러닝#시티 트레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