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도서관]40대, 죄를 지을 조건을 갖추는 시기…‘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0일 14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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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홀’의 소설가 편혜영 씨. ‘홀’의 원형인 단편 ‘식물애호’가 최근 미국의 주간지 ‘뉴요커’에 게재됐다. 동아일보 DB
장편 ‘홀’의 소설가 편혜영 씨. ‘홀’의 원형인 단편 ‘식물애호’가 최근 미국의 주간지 ‘뉴요커’에 게재됐다. 동아일보 DB
‘사십대야말로 죄를 지을 조건을 갖추는 시기였다. 그 조건이란 두 가지였다. 너무 많이 가졌거나 가진 게 아예 없거나. 즉 사십대는 권력과 박탈감, 분노 때문에 쉽게 죄를 지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오만해서 손쉽게 악행을 저지른다. 분노나 박탈감은 곧잘 자존감을 건드리고 비굴함을 느끼게 하고 참을성을 빼앗고 자신의 행동을 쉽게 정의감으로 포장하게 만든다. 힘을 악용하는 경우라면 속물일 테고 분노 때문이라면 잉여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십대는 이전까지의 삶의 결과를 보여주는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

-편혜영 ‘홀’ 중 일부

편혜영 씨의 단편 ‘식물애호’가 이달 초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요커’에 실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뉴요커’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앨리스 먼로, ‘롤리타’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실렸었다.

‘홀’은 ‘식물애호’를 장편으로 늘린 작품이다. 단편이 원형이었으니 헐겁지 않겠느냐는 우려와 달리 읽히는 속도감이 빠르다. 놀라운 건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기’가 식물인간 상태라는 것이다. 오기는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를 잃었고 불구가 된다. 그를 돌보는 건 딸을 잃은 장모다. 작가는 소설 대부분에 걸쳐 오기를 눕혀놓은 채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완벽하게 안정된 삶을 사는 듯 보였던 40대 대학교수 오기의 삶이 들춰지면서 ‘구멍’(홀)들이 하나하나 드러난다. 특히나 40대에 대한 인용구들에, 40대와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불편하게 공감할 것이다.

편 씨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설정 위에서 공포를 자아내는 소설들을 써왔다. ‘홀’의 설정은 그야말로 현실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포가 더욱 깊다. 현실이 환상보다 무섭다는 것,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 사고들을 통해 요즘의 우리는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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