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거꾸로 가는 대통령의 시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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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2017년 3월 24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강조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요즘,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은 커녕 낡은 시대의 장면들이 자꾸 재방송처럼 연출된다.

김학의 사건 등에 대해 대통령이 한마디 하자 즉시 나라의 공권력이 총동원되는 분위기다. 법무부 장관은 복창하듯 철저 이행을 다짐한다. 공영방송 ‘땡전 뉴스’ 첫머리에 등장한 대통령이 근엄한 표정으로 “사회부조리 척결”을 말하면 온 나라 행정력이 총동원됐던 시대의 데자뷔다.

동아일보는 2013년 당시 김학의 법무차관이 연루된 별장성접대 사건 보도를 주도하며 숱한 의혹을 파헤쳤다. 하지만 언론의 부실 수사 비판에 귀를 닫은 채 “동영상 속의 인물을 식별하기 어렵다”며 흐지부지해버렸던 검찰 경찰이 이제야 태도가 바뀐 듯하다. 김학의, 장자연, 버닝썬 사건은 당연히 진실을 낱낱이 밝혀내야 할 사안이다. 검찰도 대통령의 지시가 없었다해도 그대로 덮을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고 대통령의 육성 동영상까지 배포됐다. 특권층 등 흥행 요소를 지닌 사건들의 클라이맥스에 대통령을 정의의 사도처럼 등장시키고픈 욕구는 이해되지만, 그 결과 검경은 이번에도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꼭두각시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 시스템이 아니라 청와대가 온갖 국사를 주무르는 ‘대통령 1인 왕정’은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새로운 대한민국’이라면 사라졌어야 할 관행들도 그대로다. 대표적인 게 온갖 자리와 이권을 나눠 갖고, 그게 순조롭지 않으면 행정력을 동원해 유무형의 압력을 넣는 행태다. “원래 선거 논공행상이라는 게 그런거다”고들 하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관행을 바꾸는 게 새로운 대한민국 아닌가.

대통령이 불쑥 꺼낸 친일파, 빨갱이 논쟁도 시계를 돌려버렸다. 총선과 재집권 전략의 일환이겠지만 그 결과 한국사회는 또다시 친일파 대(對) 민족자주세력의 대결 프레임으로 접어들게 됐다. 한국사회를 친일파와 독재권력, 친미 매판자본 연합세력 대(對)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한 민족·민중세력의 대립구도로 이등분해 바라봤던 군부독재 시절의 데자뷔다.

문재인 정권은 한국사회 문제의 근본 이유를 친일파에서 찾는다. 그런데 친일파건 친미파건 친중파건 그런 건 그 나라의 힘에 빌붙어 이권과 특혜를 얻는 세력일 텐데, 지금 일본 등의 나라가 우리사회에서 그런 힘을 가진 존재인가. 지금 우리 사회에 특권을 누리는 친일파가 얼마나 남아 있길래 그렇게 강조하는 걸까. 반민특위에 대한 제1야당 원내대표의 망언은 특별히 일본을 옹호하고 싶어서라기 보다 역사와 사회과학 공부를 게을리한 무식의 소치 아니었을까.

문 대통령은 2012년 6월 대선 출마출정식과 지난해, 올해 3·1절 만세삼창을 독립문에서 했다. 독립문은 일본이 아닌 중국 사대주의를 배격하기 위해 1897년 세워진 것인데, 좁은 우물을 벗어나 변화하는 세계를 보자는 그 정신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금 문재인 정부에 필요한 것은 시야를 민족이라는 울타리와 과거에 두지 말고 세계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안정적인 민주주의, 자유무역 확산을 누렸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엔 패권 무역이 판을 치고 있다. 다자간 규범은 약화되고 개별 강대국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질서로의 초입에 들어섰다. 전후 한국의 지속적·안정적 성장과 안보를 담보했던 국제환경에 근본적 변화가 일고 있다. 진정한 친구를 확보하지 못하면 고립될 수밖에 없는 시대다.

이런 시기에 한미동맹은 흔들리고, 중국엔 무시당하고, 한일관계는 최악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여권 핵심 누구도 이를 걱정하지 않고 정치적 득실로만 따진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사회 좌우의 소수 극단을 제외하면 누구도 반대편 이념을 가진 이를 빨갱이 등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친일파의 빨갱이 낙인찍기를 걱정할 시대는 수십 년 전에 지났는데 대통령의 시계만 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이란 약속을 들은 지 2년이 지났지만, 떡고물을 나눠 먹는 진영만 바뀌었을 뿐, 낡은 시스템, 낡은 프레임은 그대로, 아니 더 복고로 치닫는 것 같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김학의 사건#반민특위#한미동맹#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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