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헌재]한국 축구, 카잔의 기적은 잊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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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앞선 두 경기도 독일전처럼 했으면 좋았을 텐데….” 최근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스웨덴이나 멕시코를 상대로도 그렇게 했으면 16강에 올라갈 수 있었을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지난달 말 러시아 카잔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 독일을 상대로 2-0으로 승리한 뒤 한국 축구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이 이전과는 180도 바뀌었다. 조별리그 첫 두 경기에서 졌을 때만 해도 한국 축구 대표팀은 ‘국민 욕받이’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독일전 승리는 이전까지의 비난과 아픔을 한꺼번에 씻어냈다. 뜻밖의 승리에 국민들은 열광했고, 한국 대표팀은 박수 받으며 귀국할 수 있었다. 입국장에 어떤 팬이 던진 계란이 날아드는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분위기가 호의적으로 바뀐 것만은 확실하다. 이제 남은 것은 한국 축구가 나아가야 할 확실한 방향 설정이다.

5일 대한축구협회가 개최한 국내 언론사 기자간담회는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정몽규 회장, 김판곤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장, 홍명보 전무 등이 참석한 이 자리는 러시아 월드컵을 통해 드러난 대표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하는 자리였다.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하긴 했다. 유소년 축구 문제 개선, 한국 축구의 4년을 책임질 감독 선임, 선수들의 해외 리그 파견 활성화 등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한 번씩 들어본 얘기들이다. 2010년 남아공 대회에서 첫 원정 16강을 이룬 뒤에도, 2014년 브라질 대회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도 한국 축구는 비슷한 내용의 개혁안을 내놨다.

참석자들의 발언 가운데 눈에 띈 것은 김판곤 위원장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대한축구협회의 철학 정립”이라는 자기 고백이었다. 그동안 한국 축구가 확실한 축구철학 없이 성적이나 여론에 휘둘렸다는 것을 자인한 것이다. 그는 “월드컵 기간에 한국 축구의 철학을 정립하려는 작업이 있었다. 철학 정립 후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지도자를 꼭 선임하겠다”고 말했다.

독일전 승리가 감격스럽긴 했지만 한국의 승리는 기술이 아닌 ‘투혼’의 승리였다. 차범근 전 국가대표팀 감독의 말처럼 “선수들이 내장의 힘까지 짜내서 일군” 승리였다. 한 번은 가능할지 몰라도 언제 다시 그런 경기를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100번 싸우면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경기가 때마침 그날 나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번 기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이뤄내지 못하면 한국 축구는 4년 후 올해 같은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개혁을 위해 독일전 승리는 잠시 잊어야 한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러시아 월드컵#한국 축구#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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