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가 만난 사람] WBA 플라이급 전 챔피언 김태식

  • 입력 2008년 11월 29일 07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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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쟁이는 주먹을 쓸 줄 알아야지. 너클로 때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못 때린다니까. 세계 챔피언이란 놈들이 딱딱딱! 이게 주먹질이냐고. 따귀 때리는 거지. 맞으면 띵 하고 맥이 쭉 빠지고 해야지. 이런 건 맞으면 짜증이 나. 거의 다 그래. 세계적으로 권투를 제대로 하는 나라가 없다고요. 하아! 이거 권투 얘기하면 나 미쳐버리는데.”

부천시 김태식복싱짐에서 만난 김태식(52)은 말문을 열자마자 흥분해버렸다. 요즘 제대로 권투를 하는 선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권투를 하지 않으니 관중이 없고, 관중이 없으니 권투가 죽는다는 얘기였다.

한국 권투사에서 ‘김태식’이란 이름은 무겁다. 통산 전적 20전 17승 3패(13KO). WBA 플라이급 전 세계챔피언. 챔피언 재위기간 불과 10개월 남짓. 그가 상대를 KO시킨 시간만큼이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권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 작은 거인이자 독일병정, 링의 풍운아였다.

최근 모 증권사의 CF에서 과거 그의 전성기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복싱의 황금기였던 80년대의 복싱팬이라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명장면. 도전자 김태식은 세계챔피언 루이스 이바라를 상대로 4분 여 동안 무려 250발의 가공할 훅을 폭발시킨 끝에 2라운드 KO승을 거두었다.

기자 역시 그 경기를 보았다. 그리고 몸을 떨며 생각했다. 이것이 권투다!

강원도 묵호에서 5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태식은 국민학교 시절에 이미 고등학생과 맞짱을(물론 일방적으로 맞았다) 뜰 정도로 소문난 싸움꾼이었다. 등교할 때면 으레 싸움을 한다고 생각하고 나갔다. 싸우는 게 즐거웠다.

그렇다고 해서 김태식이 무조건 아무나 시비를 걸어 싸우거나 동급생 ‘삥’이나 뜯는 3류 불량생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로 못 사는 아이를 무시하고 구박하는 잘 사는 집 아이들이 김태식의 주먹밥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이런 모습을 봤다 하면 주먹을 날렸다. 코피가 터지면 오히려 더 미쳐버렸다. 김태식의 코에서 피가 보이는 날, 상대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김태식은 프로 지망생으로 치면 거의 ‘환갑’이라 해도 무방할 21세에 권투를 시작했다. 10대 시절부터 권투선수가 꿈이었지만 체육관에 갈 돈이 없었던 것이다.

“제 손 보실래요? 전 손도 병신이에요. 보세요.” 그가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엄지손가락이 기형이다. 어릴 적 사고를 당해 다친 손가락. 당시 의사는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고 했다.

다친 손가락 때문에 정권을 쥘 수 없었다. 아니, 상대를 치면 오히려 내 손이 아팠다. 김태식은 아픈 정도가 아니라 ‘죽는다’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오른손을 접고 왼손으로 권투를 했다. 오른손 훅을 날릴 때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변형 훅을 쳤다. 요즘 인기 있는 K-1 선수 레이 세포(뉴질랜드)의 부메랑 훅은 알고 보면 김태식이 원조이다.

1977년 11월 김태식은 부활한 MBC권투 신인왕전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 이후 KO연승 퍼레이드. 14전 만에 10연속 KO승을 거뒀다. 한국권투 바닥에 물건이 떴다고 소문이 났다.

하루는 매니저 A가 그를 불러 “야, 태식아. 너 돈 좀 벌어야지?”하더니 신촌으로 가보라고 했다. 가 보니 김사왕, 이승훈이 와 있었다. 처음엔 몰랐다.

10연속 KO승 퍼레이드 ‘괴물 탄생’

“프로모터들끼리 선수를 사고 판 거죠. 나는 B씨가 하던 모 체육관에 낙찰이 된 거고. 78년 1월에 부산에서 시합을 했는데 파이트머니를 5만원 주더군요. 그게 부산 가는 차비, 먹고 자는 거 다 포함된 거예요. 3월에는 서울에서 시합을 했는데 5만 5000원을 줍디다. 명색이 국제시합인데. 돈 줄게, 집 사줄 게 하더니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시합만 하라는 거예요.”

나중에야 알았다. 전 매니저가 김태식, 이승훈, 김사왕을 ‘묶어서’ 4500만원에 B에게 넘겼다는 것을. 지금이라면 수 십 억에 달하는 큰 돈이었다.

세 명중 ‘머리’가 김태식이었다. A를 찾아가 다음 시합 뛰면 얼마를 줄 거냐고 따져 물었다. 기분 나쁜 듯 쳐다보더니 “20만원. 더는 못줘”했다.

100만원은 받아야 하는 경기였다. 성냥을 켜고는 매니저 앞에 놓인 책에다 불을 싸지르고 돌아섰다.

8개월 가까이 방황을 했다. 권투를 하고 싶어도 업계 실세들 눈 밖에 난 터라 링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동아일보 기자의 도움으로 평생의 은인이자 후원자였던 김상기 회장을 만나게 됐다.

권투 열렬 애호가인 김 회장은 순수한 마음으로 권투인들을 돕고자 했지만 악덕 권투 관계자들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김태식에게 ‘직거래 후원’을 제안했다.

다시 링으로 돌아온 그는 KO 퍼레이드를 이어갔다. 세계챔피언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던 어느날, 김상기 회장이 그를 불렀다.

당시 플라이급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일본의 구시켄 요코가 김태식과의 대진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 선수들을 다 받아주면서도 김태식은 싫다는 것이었다. 그 속이 뻔했다.

타이틀전 250발 ‘폭풍 훅’ 명장면 연출

그 바람에 그는 한 체급을 올려 플라이급으로 전향했다. 권투에서 한 체급은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당시만 해도 세계적인 천재복서들이 체급을 올렸다가 다 ‘죽었다’. 체급을 올리는 것은 더 이상 체중을 유지할 수 없어서이다. 그런데 김태식은 감량이 아니라 거꾸로 체급을 올렸다.

드디어 고대하던 챔피언과의 시합이 잡혔다. 상대는 베네주엘라의 곤잘레스. 김태식과 비슷한 파이터 스타일이었다. 그날부터 김태식은 ‘Kill 곤잘레스’를 외치며 강훈에 들어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곤잘레스가 루이스 이바라에게 패해 챔피언 벨트를 빼앗겼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상대가 중간에 바뀌어 버린 것이다.

“비디오를 구해서 이바라 경기를 봤죠. 그런데 1라운드부터 15라운드까지 이바라가 곤잘레스를 완전히 갖고 노는 거야. 진짜 잘 하더라고.” 솔직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붙어야 했다. 김태식이 배짱 하나는 좋았다. 큰 시합을 앞둔 전날 밤은 어지간한 선수들도 잠을 제대로 못 잔다. 그런데 김태식은 코를 골며 잘도 잤다. 매니저, 트레이너들이 그런 김태식을 보며 “진짜 이 놈은 물건이다”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라운드를 접었죠. 15라운드를 7, 8라운드라고 생각하자. 아니 8라운드까지도 못 간다. 5라운드 안에 승부를 보자. 그 안에 못 끝내면 진다.”

1980년 2월 17일 장충체육관. 드디어 WBA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전이 열렸다. 링에 오르니 왼손잡이 이바라가 오른손잡이로 나왔다. 기술이 워낙 좋아 왼쪽 오른쪽을 다 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당황한 김태식이 초반에 밀렸다. 2분쯤 지나면서 이바라가 코너에 잡혔다. 그리고 권투사에 길이 남을 김태식의 250연발 훅포가 불꽃을 뿜었다.

관중의 엄청난 환호성에 1회전 종료 공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 덕분에(?) 이바라는 10초 동안 공매를 더 맞아야 했다. “돌아서서 중립으로 가는데 함성 소리에 정신이 몽롱해지더라구요. 그 바람에 혼자 링줄을 붙잡고 정신을 집중하느라 혼났죠.”

강철같은 맷집으로 이바라는 김태식의 펀치세례를 버텨냈다. “끄윽, 끄윽 …”하면서도 끝까지 견디던 이바라가 결국 두 번째 쓰러지고는 일어나지 못했다.

2차방어 경기5분전 글러브 변경 통보

그의 복싱운은 여기까지였나보다. 필리핀 선수 아르넬 아로살과의 1차 방어전 경기에서 김태식은 상대의 버팅에 턱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매니저에게 말을 하니 오히려 인상을 썼다. 노게임이 되면 파이트머니에 문제가 생긴다. 매니저는 본전 생각이 난 것이다. 비정한 세계였다. 김태식은 이를 악 물고 박살난 턱으로 15회까지 버텼다.

본인 말로 ‘울면서’ 뛰었다. 같은 해 우여곡절 끝에 미국 LA에서 열린 2차 방어전에서 김태식은 남아공화국의 피터 마테블라에게 1-2 판정패를 당하면서 타이틀을 잃는다.

김태식은 이 경기를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5라운드를 마치고 코너로 오는데 마테블라가 자신이 이긴 양 링 위에서 뛰고 난리가 났다.

“저거 ‘또라이’ 아닌가 생각했죠. 그런데 판정이 오래 걸리는 거야. 5분 이상 링 위에서 기다렸는데 거꾸로 뒤집어져서 나온 겁니다.”

애초부터 수상한 경기였다. 공개스파링을 못 하게 해 상대가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도 모르고 링에 올라야 했다. 평소 끼던 멕시코제 6온스 글러브가 아닌 일제 8온스 글러브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김태식은 경기 시작 5분전에 통보받았다. 강펀치 김태식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황당했죠. 매니저는 아무 말도 없고. 난 지금도 왜 글러브가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 소리를 듣고 ‘X팔, 나 시합 안 해’하고 돌아서버렸습니다. 그런데 스텝들이 막 밀어내는 거예요. 등을 보인 상태로 밀려서 경기장으로 들어갔죠.”

챔피언 벨트를 잃은 김태식은 81년 8월 30일 안토니오 아벨라에게 도전하지만 2회 2분 46초 만에 충격의 KO패를 당하게 된다. 2회전에서 난타전을 벌이다가 아벨라의 주먹을 맞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뇌수술후 한때 사망설…권투에 환멸도

펀치를 견디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가 등 뒤에서 날아온 ‘비인간적인’ 훅을 허용하고는 거의 링 밖으로 떨어질 뻔했던 처참한 패배였다.

1982년 9월 4일 대구. 멕시코 로베르토 라미레스과의 재기전에서 김태식은 스스로도 부끄러운 판정승을 거둔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경기가 끝난 후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가 4시간 30여 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선수생명뿐만 아니라 인생이 걸린 뇌수술이었다.

“1라운드에 빵! 하고 맞으면서 머리가 홱 돌았어요. 난 링에 올라가면 누구보다 독하게 하거든요. 그런데 라미레스랑 경기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링 밖에 있는 동생을 보고 말을 걸었어요. 이미 정신이 나간 거지.”

경기가 끝나고 탈의실로 들어온 김태식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콜라를 달라고 하더니 피투성이가 된 두 주먹 사이에 병을 끼고 마셨다. 곧바로 호흡 곤란 증상이 왔다. 그리고 구토가 시작됐다. 거기까지가 김태식이 기억하는 전부이다.

이날 밤 대구 최고의 뇌수술 전문의 김인홍 박사는 혼자 술을 마시며 김태식의 중계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김태식이 실려 왔다.

서울로 올라갈 시간이 없었다. 수술 부위를 뜯으니 피가 팍 터져 나왔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어릴 적에 3층에서 떨어져서 머리를 다친 일이 있어요. 그때 제대로 치료를 안 한 것이 일생의 화근이 된 거죠. 사실 이미 미국에서 시합할 때부터 증세가 있었어요. 머리를 다친 상태에서 권투를 계속한 것부터가 잘못됐던 겁니다.”

LA에서 마테블라에게 패한 뒤 김태식은 병원에 갔지만 검사를 받지 않고 뛰쳐나왔다. 검사를 하면 100% 이상이 발견될 것이고 결국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권투 인생이 끝나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81년에도 세브란스 병원에서 도망쳤다.

김태식이 뇌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들이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몇몇 언론들은 악의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특히 중계 계약 건으로 김태식을 곱지 않게 보던 한 방송사가 심했다.

맞수 박찬희와 대결 불발 지금도 아쉬워

퇴원을 해서 지난 뉴스를 보고 있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김태식이 뇌수술을 받고 식물인간이 됐다’, ‘침을 질질 흘리고 말도 못한다’는 식이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김태식이 죽었다’, ‘식물인간으로 살고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토록 사랑했던 권투에 환멸을 느끼고 권투계를 떠났던 김태식은 무역회사, 고깃집 등을 운영하다가 지난해 부천에 복싱짐을 열며 링으로 돌아왔다.

현역시절에 대한 아쉬움 하나. 친구이라 라이벌로 역시 WBA챔피언을 지낸 박찬희와 승부를 가려보지 못한 점이다. 아마추어 복서출신으로 올림픽에도 출전했던 박찬희가 엘리트코스를 밟았다면 김태식은 전형적인 ‘들꽃’이었다.

그래서 꼭 한 번 붙어보고 싶었다. 돈을 안 줘도 좋았다. “누가 이겼을까”라는 질문에는 “아마, 찬희는 알 걸요?”하고 웃었다.

“권투는 팔자인데 … 운명은 기구하죠. 머리도 그렇고, 손가락도 다치고. 타고나기는 전형적인 권투인데 못 하는 입장이니.

그래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미쳤죠. 난 미쳤어요.” 그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것은 한 존재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결국 미쳐버린 자의 주먹이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사진=박화용 기자 imphoto@donga.com

김태식 <프로필>

1957년 강원 묵호 태생 1977년 프로복서 데뷔.

MBC권투신인왕 1980년 WBA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통산전적 20전 17승 3패(13KO)

별명 : 작은 거인, 독일병정, 링의 풍운아

[화보]‘링의 풍운아’ 김태식 그의 인생과 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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