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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뒷談]난 아직도 축구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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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뒷談]난 아직도 축구를 꿈꾼다

이승건 기자 입력 2015-10-03 03:00수정 2015-10-0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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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은퇴 태극전사 조재진 지금은
축구 국가대표 공격수로 활약하다 선천성 고관절 이상 증세로 만 29세의 나이에 일찍 그라운드를 떠났던 조재진은 은퇴 후 골프 사업가로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조재진이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의 한 카페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고양=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2011년 3월. 한 축구 선수가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30세. 생일이 지나지 않았기에 만으로는 29세. 한창 그라운드를 누빌 나이였다. 현재 프로축구 K리그 클래식 전북 현대에서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는 이동국이 36세, 수원 삼성의 간판스타 염기훈이 32세라는 것을 떠올리면 때 이른 은퇴였다. 그는 “선수에겐 치명적인 선천성 고관절 이형성을 앓고 있다. 아쉽지만 더는 뛸 수 없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황새’ 황선홍의 뒤를 잇는 선수라는 평가속에 ‘작은 황새’라고 불렸던 조재진(34). 사업가로 변신한 그를 만났다. 》


짧지만 굵었던 축구 인생

경기 파주에서 태어난 조재진은 스포츠 마니아인 아버지가 다니는 조기축구회를 따라다니며 일찍부터 축구의 즐거움을 알았다. 파주 신산초에 입학하자마자 축구부에 가입했다. 서울 대신중을 다닐 때만 해도 그는 아주 작았다. 힘도 부족했다. 축구 실력은 인정받았지만 전방 공격수로 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신고 진학 후에 ‘이변’이 일어났어요. 1, 2학년 때 부상으로 3개월씩 두 번을 쉬었는데 그 기간에 15cm씩 큰 거죠. 2년 동안 30cm가량 커 지금 키(185cm)가 됐어요.”

‘장신 스트라이커’의 면모를 갖춘 조재진은 초고교급 선수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고교를 졸업한 2000년에 수원 삼성에 입단했다.

“사실 대학을 가고 싶었어요. 오라는 곳도 있었고…. 곧바로 프로에 가게 된 것은 학교가 수원 삼성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죠. 지명을 거절하면 지원이 끊긴다기에 감독님과 코치님의 설득을 받아들였죠. 지금 생각하면 잘한 것도 같아요. 일찍 프로를 경험했고 군대도 빨리 해결했으니까요.”

당시 수원은 1998년부터 정규리그 2연패를 달성한 최강 팀이었다. 고교를 갓 졸업한 조재진이 주전으로 뛸 수는 없었다. 2년 동안 8경기 출장에 그쳤던 그는 상무에 입단한 뒤 출전 시간이 늘었다. 기량도 함께 늘었다. 상무에서 뛰던 2003년 그는 김호곤 감독이 이끄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명단에도,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의 A대표팀 명단에도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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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진이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2006년 5월,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한국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평가전에서 환상적인 골을 넣은 뒤 환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그의 이름이 축구 팬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것은 올림픽 대표로 보여준 활약 덕분이었다. 조재진은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팀 최다인 3골을 기록하며 한국의 6전 전승을 이끌었다. 본선에서도 2골을 터뜨리며 한국의 사상 첫 8강 진출에 앞장섰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본선 3경기에 모두 선발 출전하며 맹활약했다. 프랑스와의 2차전에서는 박지성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1-1 무승부를 도왔다.

독일 월드컵이 끝나자 해외 리그에서 영입 제안이 왔다. 2006년까지였던 일본 J리그 시미즈와의 계약 기간을 마친 뒤 2007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뉴캐슬과 구체적인 조건까지 합의했다. 메디컬 테스트만 통과하면 프리미어리거가 될 수 있었다.

“18시간 가까이 검사를 받았죠. 그 뒤 클럽 사무실에서 기다리는데 추가로 검사를 하자더군요. 선천성 고관절 이형성이 문제가 된 거죠. 이후 풀럼, 포츠머스에서도 메디컬 테스트를 받았는데 통과하지 못했어요. 사실 제가 이 질환을 자각한 것은 2004년부터였죠. 그때만 해도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그해 일본 시미즈로 이적할 때도 메디컬 테스트를 했는데 ‘책임감 있게 뛸 수 있느냐’고 물어 ‘받아만 주면 자신이 있다’고 했죠. 일본에서는 의지만 있으면 통했는데 프리미어리그는 엄격하더라고요.”

축구 인생 최대 목표였던 프리미어리거가 좌절된 조재진은 K리그로 돌아왔다. 그가 몸담은 팀은 최강희 감독의 전북 현대모터스였다.

“전북에서도 메디컬 테스트에 걸렸는데 최 감독님께 아직까지는 뛸 수 있다고 했어요. 흔쾌히 허락해 주시더라고요. 최 감독님은 정말 존경하는 분이에요. 당시 제가 고액 연봉자였는데도 ‘축구 오래 하려면 서두르지 마라’고 하시며 최대한의 배려를 해 주셨죠. 나이 많은 고참 선수들에게도 ‘알아서 관리해 줄 테니 부담 갖지 말고 뛰어라’고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고참은 후배들을 챙기게 되고 자연스럽게 팀 분위기가 좋아지는 거죠. 처음 수원에 갔을 때 만났던 김호 감독님도 대단한 분이었어요. 신인인 저를 불러 놓고 해외 리그 경기 비디오를 함께 보며 ‘저런 건 배워야 한다’며 일대일 강의를 해주셨죠. 밤새 비디오나 축구 서적을 보며 공부하다 소파에서 주무시는, 축구만 아는 분이었습니다.”

조재진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맹활약한 뒤 광고계의 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청바지 브랜드 리바이스 모델로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했던 조재진. 동아일보DB
연예계 러브콜 거절… 사업가로 새로운 인생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난 뒤 조재진은 스타가 돼 있었다. 근육질 몸매에 잘생긴 얼굴도 그의 인기에 한몫을 했다. 그해 8월 그는 청바지 리바이스와 모델 계약을 체결했다.

“그때가 제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시미즈에서 뛸 때인데 일본 팬들이 한국 매장까지 찾아가서 받은 브로마이드를 들고 와 사인을 받아 갔어요. 지금은 알아보는 사람도 없지만요. 하하.”

은퇴를 선언한 그에게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한 방송국에서는 예능국장까지 나서 고액의 출연료까지 보장했지만 조재진은 응하지 않았다.

“선수 생활은 접었지만 어찌됐든 축구 쪽 일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여자 파트너와 춤을 추는 프로그램 같은 경우 결혼을 앞둔 아내 눈치도 봐야 했고요(웃음). 요즘도 연예계에서 ‘나와서 얼굴 알리면 사업에도 도움이 되고 광고도 찍어 돈 벌 수 있다’며 연락이 와요. 그래도 관심 없어요. 제가 조금 보수적이기도 하고.”

그라운드를 떠난 조재진은 골프에 재미를 붙였다. 선수 시절에도 가끔 필드에 나갔지만 제대로 배운 적은 없었다. 은퇴 후 시간이 많아진 조재진은 프로를 찾아가 레슨을 받으며 골프 실력을 키웠다. 베스트 스코어가 75타이니 아마추어로는 수준급이다.

“지인이 소개해 준 방준용 프로에게 골프를 배웠는데 그 형(방 프로)이 일본의 명품 골프 클럽 디자이너인 조지 타케이 씨와 친한 사이더라고요. 조지 씨는 GTD(조지 타케이 디자인)라는 브랜드를 런칭 했는데 지난해 제게 함께 사업을 하자고 제의를 했어요. 조만간 골프 용품과 클럽을 판매하는 GTD코리아라는 회사를 론칭할 계획입니다.”

“내 이름 딴 축구 아카데미 만드는 게 꿈”

대표이사라는 직함을 가졌지만 조재진은 여전히 축구인으로 살고 싶어 한다. 은퇴 후 가장 먼저 한 일도 지도자 연수였다. 초등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3급 자격증은 얻었다.

“일본에서 연수하며 2급, 1급도 따려 했는데 뒤로 미뤘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선수로 뛰는 동안 너무 가족과 떨어져 지냈더라고요. 더는 외롭게 지내기 싫어서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왔죠. 2012년 2월에 첼로를 전공한 아내와 결혼했고 이듬해 아들(현후), 올해 딸(하은)을 얻었어요. 셋째요? 안 낳을 겁니다. 둘 키우는 것도 저나 아내나 힘들더라고요.”

태극마크, 월드컵 출전, 프리미어리거. 축구 선수로서 조재진의 목표는 세 가지였다. 두 개는 이뤘고 하나는 다 잡은 기회를 놓쳤다.

“팔불출 같지만 아들 현후가 운동신경이 좋은 것 같아요. 본인이 원하면 축구를 시킬 겁니다. 축구만큼 멋있는 운동이 없잖아요. 저는 많이 맞아가며 운동을 했지만 학교 지도자로 있는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요즘은 어림도 없대요. 바로 경찰에 신고하고 학교에서도 잘리고…. 제가 못 이룬 프리미어리거의 꿈을 아들이 이뤄줬으면 정말 좋겠어요. 딸 하은이는 음… 재능이 있다면 골프를 시키고 싶어요.”

조재진은 경기 남양주시에 산다. 서울 청담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가 지난해 1월 이사를 했다.

“남양주에는 결혼한 누나가 살아요. 선수 시절 휴가 때 누나 집에 오곤 했는데 주변 자연환경이 너무 좋더라고요. 아내는 서울을 떠나기 싫어했는데 지금은 만족해요. 남양주가 제2의 고향이 된 셈이죠.”

그가 남양주시를 삶의 터전으로 잡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과밀한 서울에 비해 축구장을 지을 만한 땅이 많다는 것이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고급 지도자 자격증을 따더라도 대학이나 프로구단 감독을 할 생각은 아직 없어요. 그 대신 제 이름을 딴 축구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어요. 주위에 보면 상가 건물 지하에서 축구 교실을 운영하는 분이 많은데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아요. 이왕이면 슛도 제대로 쏘고 마음껏 공을 날릴 수 있는 정식 규격의 축구장을 만들 겁니다.”

막연한 꿈이 아니었다. 그는 축구장을 지을 땅을 여러 군데 알아봤다. 남양주시 관계자를 만나 브리핑도 했다.

“제가 사업으로 성공한다고 해도 땅을 살 정도는 아니겠죠. 시장님께 땅만 제공해 주면 시설 투자는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어요. 남양주시에는 축구장이 많이 부족해요. 동호인 축구 경기라도 하려면 제비뽑기를 해야 됩니다. 그러다 보니 시장님도 축구장 건설에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구체적인 터도 알아봐 주셨어요. 하지만 접근성이 떨어져 지금은 다른 곳을 찾고 있습니다.”

조재진은 선수 시절 팬들에게 사인을 할 때 이런 글을 적곤 했다.

‘나는 공을 차는 게 아니야. 90분간 리듬을 타는 거지.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진통제를 먹고 주사를 맞아도 찾아오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더는 축구를 할 수 없었던 조재진. 그는 쉽지 않아 보이는 ‘JJ(재진) 축구 아카데미’라는 간판이 걸린 공인 규격의 축구장에서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을까. 한때 대한민국 최고 스트라이커였던 그가 꿈나무들에게 가르쳐 줄 ‘리듬 타는 방법’이 기대된다.

고양=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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