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인메모리] 중고차매매 사장으로 변신 전 쌍방울 투수 박진석

  • 입력 2009년 2월 19일 0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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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색과 흡사한 회색빛 전투복, 머리와 가슴에 새겨진 촌스러운 번개마크,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전력.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그들은 완산벌에 진지를 구축하고 천하를 도모했다. 부족한 전력은 벌떼작전으로 메우고, 맨주먹과 일당백의 투지로 무장해 한때 거센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싸우는 돌격대. 결국 천하제패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0년 만에 장렬하게 산화했지만 그들이 벌인 10년간의 치열했던 완산벌 전투 이야기는 이제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1990년 세상을 나와 1999년을 끝으로 사라진 쌍방울 레이더스 얘기다.

‘쌍방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벌떼 마운드’. 그 일벌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졌다. 쌍방울이 사라진 지 10년. 둥지를 잃은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벌떼의 한 축을 이루던 투수 박진석(41)을 광주에서 만났다. 야구계에서는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벌처럼 부지런히 살고 있었다.

○중고차는 슬럼프가 없다

광주광역시 임동. 광주구장 근처 전남방직 내에 있는 중고차매매상가에서 그는 ‘T·S 모터스’를 운영하고 있다. 사무실 2개에 직원 15명을 두고 있는 사장님. 현역 시절에도 듬직한 체격을 자랑했지만 살이 많이 불어났다.

“가끔 야구선수 아니었느냐고 묻는 고객도 있지만 살이 쪄서 알던 사람도 얼굴만 봐서는 몰라볼 때가 많아요. 이젠 은퇴한 지도 10년이 다 돼 가는데 저를 기억하겠습니까.”

2008년 1월부터 시작한 중고자동차 매매업. 예전부터 이 일을 해오던 매제가 “이거 해보면 괜찮다”며 이끌어준 길에서 그는 새로운 인생의 항로를 찾았다.

“장사가 꽤 잘 돼요. 지금 경기침체로 다들 어렵다고 난리인데 여기는 경기를 타지 않는 것 같아요. 작년이나 지금이나 매출이 똑같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는 중고차를 사고파는 분이 더 많을 수밖에 없죠. 중고차는 슬럼프가 없는 것 같아요.”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그는 “프로야구 선수 때 최고연봉이 4500만원이었는데 그것보다는 훨씬 많이 벌고 있다”고만 귀띔했다.

○비싼 수업료 내고 배운 사회생활

2000년 SK에서 유니폼을 벗은 그는 사회로 나온 뒤 어려움부터 겪었다. 처음에 시작한 일은 ‘여성 피부 비만 스포츠마사지’.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마운드에서는 뻔한 타자들과 상대하면 됐지만, 사회에서는 생소한 사람과 상대해야했다.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운동만 하다 뭣도 모르고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했어요. 은퇴할 때까지 알뜰살뜰 모아둔 돈을 투자했는데 순진해서 주위사람에게 속는 바람에 손해도 많이 봤죠. 그래도 세상살이 공부를 했으니까. 물론 비싼 수업료를 냈지만.”

실의에 빠졌던 그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모교인 군산상고에서 코치와 감독을 하다 다시 사업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처가가 있는 광주에서 이번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추격자 이만수, 도망자 박진석의 추억

여전히 옆집 아저씨처럼 순박한 인상과 성실해 보이는 미소. 그런데 그를 보니 10여년 전 ‘헐크’ 이만수와 벌인 그 일부터 떠올랐다.

1996년 6월 23일 대구구장. 삼성 5번타자 이만수는 2회말 선두타자로 나서 쌍방울 선발투수였던 박진석의 투구에 배를 맞고 걸어나갔다. 쌍방울이 4-0으로 앞선 4회말. 1사후 이만수가 두 번째 타석에 나섰다.

쌍방울 포수 박경완이 “선배님, 이번엔 좋은 공 하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이만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식,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됐지, 뭘 좋은 공까지….’ 그러나 초구가 얼굴 쪽으로 휙 날아들자 황급히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박경완은 마운드의 박진석에게 고함을 쳤다. “괜찮아, 몸쪽에 하나 더!”. 그리고 2구째 커브가 그만 헬멧을 때렸다.

이만수는 곧바로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헐크’로 돌변해 마운드로 달려갔다. 그런데 으레 한판 붙을 자세를 취해야할 박진석은 이만수가 가까이 다가오자 줄행랑을 쳤다.

이때부터 쫓고 쫓기는 코미디. 박진석은 그라운드를 돌고 돌아 덕아웃으로 도망가버렸고, 이만수는 싸움을 말리기 위해 나선 쌍방울 선수에게 붙들려 씩씩거리기만 했다. 둘 다 곧바로 교체됐고, 주심에게 경고를 받은 뒤 경기가 속개됐다.

13년이 흘렀지만 박진석 역시 그 사건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웃음부터 터뜨렸다.

“4-0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인데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고의로 맞힐 일은 없죠. 그런데 너무 화가 난 표정으로 달려오시니…. 대선배인데 부닥치면 안되겠다 싶어서 도망간 거죠. 다음날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는데 선배가 오히려 ‘내가 흥분하는 바람에 네 승리를 날리게 해 미안하다’며 저에게 위로를 해주시더라고요. 지금은 그것도 추억이고, 야구를 하면서도 그런 게 사람 냄새나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이만수 역시 그때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다음날 신문에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죠. 내가 봐도 너무 웃겼어요. 나는 발이 느려서 도저히 잡을 수 없었어요. 진석이 발도 빠르더라고. 진석이도 착했죠.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선배니까 싸우지 않고 도망가고 그랬던 거죠. 다음날 사과까지 하러 오고.”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드라마 재현

1972년 황금사자기에서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등이 주축이 된 군산상고는 부산고와의 결승전에서 1-4로 뒤진 9회말 5-4로 대역전극을 펼쳐 ‘역전의 명수’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박진석은 초등학교부터 야구를 함께 한 죽마고우 조규제와 함께 다시 한번 ‘역전의 명수’ 드라마를 재현해 주목을 받았다. 1학년 때 청룡기 결승전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팀 우승을 이끌었을 정도로 투수로 각광받았던 그는 팔꿈치 통증으로 타자로 전향했다.

마운드는 조규제에게 맡기고 그는 4번타자로 타선을 이끌었다. 3학년 때인 1986년 대통령배 결승전. 경남고에 0-1로 뒤진 9회말 동점 2루타를 날리면서 연장 11회에 2-1 역전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해 마지막 대회인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결승 솔로홈런을 날리며 그해 군산상고의 전국대회 2관왕 등극에 공을 세웠다.

○미완성으로 끝난 투수의 꿈

1991년 4월 5일 대전구장. 1년 전 전주를 연고로 제8구단으로 창단한 뒤 김인식 초대 감독의 지휘 아래 2군에서 조용히 전력을 배양하던 레이더스가 공식적으로 세상에 처음 나온 날이다.

당시 빙그레는 늘 우승후보로 꼽히던 최강팀. 모두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바라봤으나 돌격대는 개막전부터 11-0으로 승리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91년 1차지명을 받은 선발 조규제가 6회까지 무실점으로 역투한 뒤 2차 특별우선지명을 받은 박진석이 나머지 3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침묵시켰다.

다른 팀에서 보내준 선수로 급조된 쌍방울은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주목받았고, 빙그레는 그 충격으로 개막 후 1승8패의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당시 김영덕 감독은 급기야 4월 16일 삭발을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선수가 아닌 감독의 삭발투혼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140km중반의 묵직한 구위. 박진석은 첫해 8승을 올렸고, 92년에는 개막전 선발로 나서기도 했다. 해마다 시즌에 앞서 “올해는 15승”이라는 장밋빛 기사가 나왔지만 그는 한번도 두자릿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시즌 초반에는 잘 나가다 고교시절부터 아팠던 팔꿈치 통증이 연례행사처럼 재발했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뒤로는 그도 벌떼 마운드의 일원이 됐고, 개인 대신 팀을 위해 헌신한 덕분에 돌격대는 96년과 97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는 2000년 SK에서 은퇴할 때까지 선발과 불펜을 드나들며 통산 23승35패 7세이브, 방어율 4.80을 기록했다.

“저는 투수로서 미완성으로 끝났죠. 한번 아팠던 팔은 원상복귀가 안 되더라고요. 1년이면 1년, 완전히 쉬었어야 하는데 그때는 조바심이 나더라고요. 한번이라도 꽃을 피우고 유니폼을 벗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한국 최고의 명장이라고 평가받는 김인식 감독님과 김성근 감독님 밑에서 야구를 배웠잖아요.”

○장외경기에서도 돌격대 정신으로

쌍방울은 10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우리 곁에서 살다갔다. 프로야구의 여덟 번째 손가락으로 태어났지만 프로야구는 그 여덟 번째 손가락을 모질게 잘라내버렸다.

누구의 유산도 물려받지 못하고 세상을 나와, 누구에게도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쌍방울 레이더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이 보여준 돌격대 정신은 우리에게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쌍방울은 희생정신이 가장 강했던 팀이었죠. 잡초근성 있잖아요. 쌍방울 출신들은 어디서나 잘 살 거예요. 포기를 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하니까. 벌떼 마운드의 벌처럼 열심히 일할 거예요. 지금도 오전 7시반에 출근해 밤 9시에 퇴근합니다. 쉬는 날도 없이. 운동한 사람도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는 공과 글러브를 내려놓고 차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돌격대 정신으로 무장한 채 치열한 장외경기를 벌이고 있다.

“지금도 야구가 좋아요. 그래도 이젠 이 일이 재미있어요. 일한 만큼 대가도 있으니까.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이젠 이 일이 제 인생의 종착역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전력투구를 해봐야지요.”

광주|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사진=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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