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혼의 복서 김정주, 다시찾은 약속의 링 ‘주먹이 운다’

  • 입력 2008년 12월 8일 0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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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올림픽복싱웰터급(-69kg) 4강전. 김정주(27)는 왼손골절을 숨기고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바키트 사르세크바예프(카자흐스탄)에 6-10으로 석패했다. 아테네올림픽에 이어 2회 연속 동메달 획득. 사르세크바예프는 결국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링 밖에는 누나 김정애씨가 있었다. 눈을 마주친 오누이. 김정주는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읜 김정주에게는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누나. 김정주는 누나와 조카에게 금메달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싸웠다.

김정주의 손은 100여일이 지난 지금도 성치 않다. 그래도 그는 글러브 끈을 조인다. 이번에야말로 ‘챔프’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킬 기회이기 때문이다. 10일부터 모스크바에서는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AIBA) 2008월드컵이 열린다. 이번 대회에는 사르세크바예프가 불참하지만 베이징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카를로스 수아레스(쿠바) 등 세계8강이 참가한다.

○‘땡초’ 글러브를 끼다

김정주의 어린 시절 별명은 ‘땡초’였다. 지금도 동급 최단신(170cm)인 김정주. 그 때도 작고, 매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덩치가 큰 친구가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모습을 본 ‘땡초’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정확히 꽂은 한 방. 승부는 쉽게 끝났다.

자초지종을 들은 선생님은 회초리대신 한 쪽 손을 내밀었다. “자, 선생님의 손바닥을 있는 힘껏 때려봐라.” 묵직한 힘을 읽은 선생님은 “복싱부가 있는 중학교에 가거든 꼭 운동을 시작해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운명처럼 복싱과 만났다.

알고 보니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도 복싱을 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큰 누나는 ‘동생이 공부나 열심히 했으면…’ 하고 바랬다. “못 배우면 사람 취급 못 받는다”는 누나의 성화에 못 이겨 김정주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책상 앞에 앉아야 했다.

천인호(49) 전(前) 대표팀 감독은 “정주는 한 번 싸운 선수의 스타일은 바로 입력할 정도로 영리하다”고 했다. 김정주는 “누나가 공부에 쓰라던 머리를 결국 운동에 쓰게 됐다”며 웃었다.

○강하기 위해 냉정해졌다

동네 싸움과 링 위에서의 ‘경기’는 달랐다. 처음에는 글러브만 끼면 얻어터지기 일쑤. ‘울컥’ 하는 성미 덕에 주먹에 대한 재능을 확인했지만, 역으로 그 성미가 김정주를 옥죄었다. 맞으면 더 달려들고, 그러다가 더 맞고. 억울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 때마다 “강해져야 살아남는다”고 가르쳤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혼자서 힘든 식당일을 감당하다 급작스럽게 세상을 등진 어머니의 ‘근성’도 새겼다.

강하기 위해 냉정해져야 했다. 김정주는 “복싱을 통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상대에게 점수를 뺏길수록 동작은 더 짧고, 빠르게.’ 이 한마디를 몸에 익히는데 6년이 걸렸다. 상대주먹을 받아치는 ‘김정주 스타일’을 완성하는 데는 2002년, 박시헌(43) 국가대표상비군 감독과의 만남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박 감독은 보폭을 짧고 빠르게 뛰는 훈련을 통해 김정주의 순발력을 배가시켰다. 스텝을 좌우로 뛰면서 날리는 크로스 훅은 김정주의 전매특허가 됐다. 김정주는 “이 때부터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2002부산아시안게임 웰터급금메달은 김정주의 차지였다. 동생의 경기에 일부러 관심 없는 척 하던 누나가 본격적으로 챙겨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

○부모님 묘소에 챔피언트로피를 바치리라

2006도하아시안게임 1회전탈락 이후 김정주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귀국길에 “차라리, 비행기가 떨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 마음을 다잡기 위해 홀로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12월의 매서운 추위.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눈발이 날리는 산세를 묵묵히 바라봤다.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호연지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꼭, 부모님 묘소에 챔피언 트로피를 바치리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김정주는 2개의 올림픽동메달에 만족할 수 없다.

조카가 맞는 모습이 마뜩잖은 큰아버지 김춘열씨는 “이제, 제발 좀 (복싱을) 그만두라”고 한다. “이번만 하겠다”던 약속은 벌써 몇 번이나 다시 해야 했다. 그럼에도 막상 조카의 경기가 열리면 “정주는 어떻게 됐냐”고 묻고, 마을잔치를 준비하는 큰아버지. 월드컵이 시작되면 또 다시 모스크바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항상 챔피언을 꿈꾸었습니다. 대진추첨(9일)을 하면 1회전에서 제일 강한 상대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망가질 왼손, 초반부터 다 쏟아 붓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선수생활을 마치기 전까지 꼭 사르세크바예프에게 설욕전을 펼치겠습니다.” 아테네올림픽에서의 갈비뼈부상,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왼손골절. 그의 부상투혼은 이번에도 계속된다. 김정주는 “안 아픈 운동선수가 세상에 어디 있냐?”고 반문하며 또 다시 링에 올랐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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