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매치 땐 피 끓는 청년… K리그가 건강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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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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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축구 수원 열혈팬, 83세 김원영 씨

수원 경기가 열리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찾아가는 ‘열혈 축구팬’ 김원영 씨. 평소 자신이 응원할 때 흔드는 ‘그랑블루’(수원 응원단 명칭) 깃발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2013년에는 모든 축구 경기장이 팬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원=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수원 경기가 열리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찾아가는 ‘열혈 축구팬’ 김원영 씨. 평소 자신이 응원할 때 흔드는 ‘그랑블루’(수원 응원단 명칭) 깃발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2013년에는 모든 축구 경기장이 팬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원=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여보! 방사능 때문에 위험하다는데 굳이 가야겠어요?”

2011년 4월 18일. 일본으로 출국하려는 그를 아내가 막아섰다. 그해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이 유출됐다. 일본은 방사능 공포에 휩싸였고 도쿄도 그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설득했다. “젊은 애들이 경기를 앞두고 있어. 악조건에서도 땀 흘려 뛸 그들을 생각하면 가지 않을 수가 없어.” 그는 기자에게 당시 자신이 응원을 하기 위해 입었던 유니폼을 내밀었다. 등번호 ‘81’과 ‘김원영’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81은 그의 당시 나이를 뜻했다.

2011년 4월 19일 일본 도쿄국립경기장에서는 수원 삼성과 가시마 앤틀러스(일본)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 예선 경기가 열렸다. 방사능 공포에 많은 수원 팬들이 원정 응원을 포기했다. 오직 김원영 씨(83·경기사회봉사회 회장) 한 명만이 응원을 갔다.

“어린 시절부터 승자의 쾌락과 패자의 울분이 강하게 공존하는 축구가 정말 좋았다”는 김 씨. 그는 1995년 자신이 살고 있는 수원을 연고로 축구팀이 창단되자 환호성을 터뜨렸다. 축구가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지역 구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19년 동안 수원의 안방 경기를 모두 관람했다. 2010년(당시 80세)부터는 방문경기까지 찾아갔고 자신이 입을 유니폼에 자신의 나이를 등번호로 새겨 넣었다. “90분 동안 응원을 하다 보면 모든 스트레스가 해소돼. 내가 정정한 것은 축구 덕분이라니까. 등번호는 세 자리까지 찍을 거야.”

그러나 그는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다. 자신과 함께 응원했던 팬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른 2002년 K리그의 평균 관중은 1만4651명이었지만 지난 시즌에는 7157명으로 떨어졌다. “2002년에는 정말 응원할 맛이 났어. 일단 관중이 많았으니까. 축구의 재미가 뭐겠어? 골이 들어가면 모르는 사람끼리도 끌어안고 함께 좋아할 수 있는 그런 거잖아.” 붉게 상기됐던 그의 얼굴에 이내 그늘이 졌다. “그런데 요즘에는 괜히 나처럼 경기장을 찾는 사람이 더 바보같이 느껴져….”

그는 “팬들을 경기장으로 끌어들이려면 라이벌 매치가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수원은 서울과 ‘슈퍼매치’라 부르는 국내 최고의 라이벌 대결을 벌인다. 슈퍼매치를 할 때면 “피가 끓는다”는 김 씨는 “라이벌과 경기를 하면 우리 팀에 대한 애착이 더 깊어진다. 내가 응원을 해서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자연스레 경기장을 찾는 빈도수가 늘어난다”며 “지역 간의 대결 구도, 선수의 이적으로 생긴 라이벌 관계 등을 프로축구연맹과 각 구단이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과 수원의 경기에서는 양 팀 서포터스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라이벌전에서 패한 팀 감독과 선수들은 서포터스에게 욕설을 듣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서포터스 문화가 훌리건(폭력을 행사하는 축구 관중)화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한다. “1990년대에만 해도 ‘야! (상대 선수를 발로) 까라, 까’라고 외치기도 했다니까. 예전에는 싸우면서 쾌감을 느끼는 팬들도 있었어.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거야. 그래도 고쳐야 할 점은 많지.” 이어서 김 씨는 “서포터스도 페어플레이를 해야 한다. 상대팀 선수가 소개될 때는 박수도 쳐주고 멋진 플레이를 했을 때는 함께 환호할 수도 있어야 한다. 모두가 함께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응원문화를 만들어야 K리그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과격한 팬들은 자신들이 감독 위에 올라서려고 한다. 그들은 감독을 맹목적으로 비판하는데 서포터스는 평가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평가는 전문가들이 할 일이다. 우리의 임무는 잘못한 감독, 선수가 우리 응원을 보고 없던 힘도 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며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포항 ○○○ 군인’ ‘수원 △△△ 교수’ 등 그가 전국의 경기장을 누비면서 알게 된 축구팬들의 전화번호 목록이었다. “얼굴을 모두 기억하느냐”고 묻자 그는 “당연하지! 수원 팬이 아니라도 모두가 축구 팬인데”라며 웃었다. K리그 2013시즌은 3월에 개막한다. 김원영 씨는 3월의 어느 봄날 ‘83 김원영’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 축구 팬들과 함께 열띤 응원을 하는 꿈을 꾸고 있다.

수원=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
#축구#김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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