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내 축구인생은 가족의 희생 덕분…이제는 조연으로 살아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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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체육회 제정 ‘2017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
차 범 근 前축구 감독

차범근 감독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독일 도베르만 3년생 수컷 주니어와 6개월 암컷 줄리를 끌어안으며 활짝 웃고 있다. “그동안 난 주인공으로만 살아왔다”는 차 감독은 “이젠 내가 조연으로 가족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차범근 감독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독일 도베르만 3년생 수컷 주니어와 6개월 암컷 줄리를 끌어안으며 활짝 웃고 있다. “그동안 난 주인공으로만 살아왔다”는 차 감독은 “이젠 내가 조연으로 가족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가족들의 희생이 컸습니다. 특히 아내가 고생했습니다.” 올 연말 대한체육회가 제정한 2017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헌액된 ‘차붐’ 차범근(64). 2010년 프로축구 수원 삼성 사령탑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영원한 감독’으로 불리는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나는 주인공으로만 살았다. 내가 축구로 성공했지만 가족들은 그 이면에서 큰 고통을 받았다. 이젠 내가 조연이돼 가족들을 주연으로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 스포츠사의 큰 획을 그은 차 감독을13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만났다.


―요즘 가족 얘기를 많이 한다.


“내 축구인생을 돌아보면 가족의 힘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성공할 때 가족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희생을 감수했다. 아내는 내가 넘어져 못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늘 나를 잘 지켜줬다. 내게 오는 비난을 다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한국 선수론 최초로 유럽 최고의 무대인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황색 돌풍’을 일으킨 차 감독이지만 그의 축구 인생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을 때 본선에서 2경기(멕시코 1-3패, 네덜란드 0-5패)를 하고 현장에서 경질되는 아픔을 겼었다. 그해 한 월간지에 ‘프로축구 승부조작’(나중에 사실로 밝혀짐) 행태를 폭로해 대한축구협회로부터 10년 자격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다. 당시 도를 넘는 비난의 화살이 차 감독을 넘어 아내 오은미 씨 등 가족을 향하기도 했다. 둘째 차두리 한국축구대표팀 코치(37)는 선수시절 한동안 언론 인터뷰를 피해 다닐 정도였다.


―독일에서 활약할 때도 오해가 있었다고 하던데….


“처음 독일 가서 적응하기 힘들었다. 프로라는 게 뭔지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갔다. 첫 시즌이 끝나고 휴가를 주기에 한국에서 하던 대로 4주 푹 쉬었다. 다시 소집하고 훈련 시작했는데 시즌 때와 똑같이 시켜 당황했다. 엄청 힘들었다. 그런데 다른 선수들은 거뜬하게 소화했다. 휴가 때도 몸 관리를 했던 것이다. 그때 알았다. 프로는 늘 몸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부터 철저하게 관리했다. 아내는 덩치 좋은 유럽 선수들을 잘 상대할 수 있도록 먹는 것부터 모든 것을 관리했다. 특히 경기를 앞두고는 컨디션 관리에 집중해야 했다. 독일 현지 한국교포들이나 한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다 신경 쓸 순 없었다. 그래서 다소 오해가 있었다. 하지만 목표를 위해서 축구에만 집중해야 했다. 성공하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성공했으니 이제 그때 오해했던 사람들도 이해할 것이다.”

차 감독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에서 활약하며 308경기에 출전해 98골을 터뜨렸다. 당시 외국인 최다골이다. 유럽 최고의 무대인 유럽축구연맹(UEFA) 컵 우승도 2차례(1980, 1988년) 경험했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독일에서 몸으로 익힌 ‘프로정신’은 한국에 돌아와서 지도자 생활을 할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도 오해를 낳기도 했다. 오 씨는 “일처리에 너무 철저해 아랫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았다. 수원 감독 시절 숙소에서 집으로 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여보 제발 집에 좀 오세요. 코치와 선수들도 숨을 쉬어야 할 것 아니에요’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고 회상했다.


―축구로 성공했다. 인생에서 축구가 뭔가.


“축구는 대문과 같았다. 축구라는 대문을 열고 나가서 축구를 하고 다시 축구라는 대문을 열고 집으로 왔다. 명예, 성공, 안정적인 삶, 사랑하는 아이들과 아내. 모든 것을 축구로 이뤘다.”

경기 화성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차 감독은 축구로 성공하겠다는 각오가 남달랐다. 서울 경신중고교 시절 밤낮없이 축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로 1971년 청소년대표, 고려대 1학년 때인 1972년 역대 최연소로 성인대표팀에 발탁됐다. 그의 눈은 국내가 아니라 해외로 향했다.
―독일 진출은 어떻게 생각했나.

“당시 국내는 실업팀밖에 없었다. 희망이 없었다. TV로 유럽 프로팀들을 볼 때 잘 갖춰진 잔디 경기장에서 꽉 찬 관중 앞에서 경기를 했다. 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독일 진출을 마음먹었다.”

영웅이란 호칭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차 감독은 우리 국민들이 힘들고 배고프던 시절 유럽 최고의 무대에서 숱한 골을 터뜨려 희망을 전해줬다. 태극마크를 달고도 A매치(국가대표 간 경기) 136경기에 출전해 58골을 터뜨렸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역만리 독일 분데스리가와 각종 국가대표 경기에서 전해지는 그의 골 소식에 환호했다. 그는 한국축구의 선구자이자 영웅이었다.
―요즘 손흥민(토트넘) 등 해외에 진출한 선수가 많다. 당시 분데스리가가 더 수준이 높다는 평가가 있는데….

“허허. 당시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만 요즘 선수가 더 잘한다. 정보기술(IT)로 따지면 새로운 기술이 좋은 것 아닌가. 난 구시대에서 축구를 했다. 시대가 달라졌다. 요즘 두리와 얘기하다 보면 옛날 사람인 것을 절감한다. 난 30년 전에 축구를 배웠다. 지금은 분석도 훨씬 정교하다. 아주 완벽하다. 축구도 변했다. 전술도 다양하고 선수들이 대처하는 기술도 다양하다. 옛날과 비교하면 안 된다.”
―그래도 정신력에선 그때와 다른 것 아닌가.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젠 옛날처럼 배고픈 시절이 아니다. 내가 과거엔 이랬다고 하면 우리 두리도 뭐라고 한다. 우리 시대에는 사명감에 불탔지만 요즘은 즐기면서도 다 잘한다.”

차두리 코치 얘기를 할 때 오 씨가 “참 어제 두리에게 문자 왔어요. 북한축구대표팀 감독이 안부 전해달라고 했대요”라고 했다. 차 감독은 “아 그래요. 아네르센, 낯도 익고 이름도 들어본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노르웨이 출신 예른 아네르센 북한 감독(54)은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독일 분데스리가 FC 뉘른베르크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2003년부터 주로 독일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차 감독은 “당시 다른 팀에 노르웨이 선수가 많았는데 그중 한 명인 것 같다”고 기억했다. 한국은 11일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컵에서 북한을 만나 1-0으로 이겼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이자 지난 브라질 월드컵 우승팀 독일을 만나게 됐다.

“독일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FIFA 초청으로 조 추첨 장소에 갔는데 입구에서 알고 지내던 독일 TV의 국장을 만났다. 혹 독일과 한 조가 되면 인터뷰를 해달라고 하더라. 그 때 속으로 ‘독일?’ 했는데 참 나, 우리가 독일하고 한 조가 됐다. 나올 때 그 친구를 보니 요아힘 뢰브 독일 감독하고 인터뷰하고 있더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함께 뛴 뢰브에게 인사는 해야 했는데 괜히 인터뷰해 달라면 곤란해 박지성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독일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어설픈 팀을 만나는 것보다는 나쁘지 않다. 최선을 다해서 잘하면 기쁨이 배가 되는 것 아니냐. 어줍지 않은 팀에 깨지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독일이 우리와 마지막 경기를 한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물론 독일이 2경기를 이기면 주전들을 빼고 젊은 선수들을 투입할 수 있다. 그런데 젊은 선수가 더 무섭다. 그들은 기회를 잡기 위해 더 열심히 뛸 것이다. 절대 방심은 금물이다. 어떤 경기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열세라고 대충하면 팬들도 안다. 하지만 한 수 아래라도 열심히 했을 땐 팬들도 박수를 보낸다.”
―최근 축구협회 집행부가 바뀌었다. 홍명보 전무이사(48) 등 집행부의 연령대가 대폭 낮아졌다.

“그 정도 나이면 큰일을 할 시기다. 다른 회사나 조직을 봐라. 홍 전무가 감독했던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면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를 줘야 할 시점에 제대로 결정했다. 변화를 시도하면 불이익을 받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쉽지 않을 것이다. 행정엔 양면성이 있다. 진통이 따르게 된다. 하지만 새 시대에 맞게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젠 유소년을 잘 키우는 시스템 확보 등 해야 될 일을 피하면 안 된다. 과감하게 변화를 줘야 한다.”


―너무 일찍 지도자를 그만둔 것 아닌가.


“우리나라에 감독 자리가 몇 개나 되나. 유럽처럼 축구 일자리가 많지 않아 안타깝다. 내 결정에 후회는 없다. 할 만큼 했다. 사명감을 가지고 유럽에서 보고 배운 것을 전수했다. 내 역할은 다했다. 이제 어린이 축구교실 등 저변을 늘리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그게 조연의 역할 아닌가.”

인터뷰 말미에 하나(39) 두리 세찌(31) 등 자녀들 이름을 한글로 지은 배경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오 씨가 답했다. “첫째 이름을 동아일보 출신 국흥주 기자님이 ‘하나’라고 지어줬다. ‘그럼 둘째는요?’ 했더니 ‘두리 세찌라고 하든지’라고 했다. 첫째 딸을 하나로 지었으니 자연스럽게 두리 세찌가 됐다.” 오 씨는 “국 기자님 근황이 어떤가요. 바쁘게 사느라 인사도 못했네요. 지금이라도 이름 지어준 보답을 하고 싶은데…”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극구 사양했지만 “어차피 시장에 가야 해요”라며 차 감독 부부는 기자를 청계천 동아미디어센터 앞에 내려준 뒤 성북 시장으로 향했다. 차 감독은 가족이 원하면 언제든 운전대를 잡는다. 수십 년 그라운드를 지배한 카리스마 넘친 남자는 아내가 “이것 좀”하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가슴 따뜻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차범근 감독은


△1953년 경기 화성 출생

△서울 경신중, 경신고, 고려대 체육교육학과

△1972년 최연소로 국가대표 발탁,

1986년까지 A매치 136경기 출전 58골 기록

△1979년 프랑크푸르트 입단, 1983년 레버쿠젠 이적

△1980, 1988년 유럽축구연맹컵 우승

△1989년 은퇴. 유럽무대 308경기 출전 98골 기록

△1991∼1994년 울산 현대 감독

△1997∼1998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

1997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올해의 감독

△2004∼2010년 수원 삼성 감독

2004, 2008년 K리그 정규리그 우승
#차범근#차붐#대한체육회#차두리#축구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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