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 대장 부인의 특이한 예감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31일 16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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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석 등반 기록 2009년 5월20일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 개척에 성공한 뒤 정상에서 동아일보 사기를펼쳐 보이고 있는 박영석 대장. 동아일보는 2000년대 들어 박 대장의 산악 그랜드슬램을 후원해왔다. 동아일보DB
박영석 등반 기록 2009년 5월20일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 개척에 성공한 뒤 정상에서 동아일보 사기를펼쳐 보이고 있는 박영석 대장. 동아일보는 2000년대 들어 박 대장의 산악 그랜드슬램을 후원해왔다. 동아일보DB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48) 일행의 구조작업을 진행하던 한국구조대가 수색을 거의 종료할 즈음 박 대장의 부인은 한국에서 전화를 했다.

남편의 실종소식에 쓰러져 한국에서 링거를 맞고 있던 부인은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했다. 구조대는 이 때 그동안 박 대장 일행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던 균열 지역 수색을 마친 뒤 절벽 밑의 빙하 지역을 살피던 중이었다. 구조대의 김창호 대원이 직접 균열 속에 들어간 뒤 균열 내 좌우 벽에 긁힌 흔적이 없고 바닥에도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

구조대는 수색 범위를 넓힌 결과 박 대장 일행이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는 경로에서 사용한 로프를 추가로 발견했다. 로프는 바위에 매어져 있었고 일부는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원들이 균열 지역을 벗어나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던 길이었음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일대는 높은 봉우리에서 쏟아진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탐침봉으로 얼음 밑을 수색하기는 불가능했다. 대원들은 더 이상의 수색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때 박 대장의 부인은 수색 지역 경사면의 오른쪽을 한 번만 더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고 구조대의 이한구 대원이 지난달 30일 실종자 가족을 위한 마지막 브리핑에서 밝혔다. 꿈이라도 꾼 것일까. 부인의 예감은 적중하는 듯했다. 대원들이 오른쪽 측면을 살피자 그 곳에 깊이 4m의 동굴이 나타났던 것이다. 대원들은 서둘러 동굴을 수색했다. 그러나 동굴엔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을 찾지는 못했지만 부인의 특이한 예감은 바다 건너에서도 미처 찾지 못했던 동굴로 구조대를 이끌었다. 박 대장 일행이 눈사태를 피해 이 동굴로 피신했다면 살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박 대장 일행의 실종 유력 지역이 균열 지역이 아닌 베이스캠프 이동 경로 일대임을 확인 한 것은 구조대의 마지막 성과였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실종 추정지가 균열 지역이 아닌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고 말했다. 실종자들이 균열 속에 빠졌다면 찾기가 어렵지만 다른 평탄한 지역에 묻혔다면 눈과 얼음이 녹는 계절에 발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편 가족들과 구조대원, 사고대책반 관계자들은 이날 저녁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구조대 진재창 대원은 "박 대장의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는 울면서 수색 지역의 눈 속에 박 대장 일행의 사진과 책을 묻고 왔다. 김재수 대원은 "후배들이 희생돼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박 대장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모두가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가족들은 고생한 구조대원들을, 구조대원들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 가족들을 위로했다. 박 대장 일행을 묻은 설산 아래의 밤은 상처받은 자들이 서로를 다시 이해하는 가운데 깊어갔다.

카트만두=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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