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수용]‘문재인 경제’의 얼굴마담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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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용 논설위원
홍수용 논설위원
이희범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장은 지난달 16일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장 등 재계 인사들을 만났다. “기업이 사회공헌 활동 일환으로 올림픽 및 패럴림픽에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방안에 대해 검토를 요청한다”고 한 복잡한 당부는 조직위가 기업과의 만남을 얼마나 조심스러워하는지 보여준다. 사회 분위기 때문에 조직위가 신중하게 총대를 멨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뒤로 빠졌다. 대통령은 7월 “기업, 특히 공기업들이 올림픽을 위해 조금 더 마음을 열고 더 많은 후원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며 요청의 대상을 정확히 알기 힘든 말을 던진 게 전부다.

올림픽 협조 요청이 정경유착이라면 평창 올림픽 특별법에 따른 특수법인인 조직위도 기업에 어떤 요청도 해선 안 될 것이다. 청와대가 나서서 말릴 일이다. 반면 올림픽이 국가적 행사라서 최순실 사태와 다르다면 대통령부터 기업을 만나 당당하게 역할을 주문해야 한다. 대리인인 조직위 뒤에 물러나 있다고 정경유착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정권이 대리인을 전면에 내세운 비슷한 사례가 국민연금공단을 통해 우회적으로 추진 중인 노동이사제다. 국민연금은 보름 전 KB금융 주주총회에서 노조가 추천한 변호사를 사외이사에 선임하는 안건에 찬성했다. 이번에는 부결됐지만 275개 상장기업의 주주인 국민연금은 ‘노동의 경영 참여’라는 정권의 과제를 대행할 수 있는 힘 있는 대리인이다. “노동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이사가 기업의 이익에 관심을 두겠나”라는 게 재계의 속내다. 그런데도 정부 입장이라고는 “노사 합의가 필요하다”는 최종구 금융위원장의 한마디가 고작이다.

더욱이 내년부터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시민단체나 노조 관계자를 참여시키는 쪽으로 제도가 바뀔 가능성이 높다. 330개 공공기관이 시민운동가와 노조 간부에게 줄을 서게 된다는 얘기다. 여기에 정부가 ‘사회적 가치’라는 새로운 평가항목까지 추가한다고 한다. 대리인인 시민단체, 노조가 공공기관을 지배할 강력한 수단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올 6월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모여 “경제정책의 컨트롤타워는 부총리”라고 외친 세리머니를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정책실장과 부총리는 교통정리가 필요했다고 해도 김 위원장은 경제팀의 여러 장관 중 한 명일 뿐이다. 부하가 상사를 격려하는 듯한 장면은 정권의 주인 격인 실세 위원장과 대리인인 임시 부총리의 실질적 서열을 보여준 것이었고 이제 그 대리인 수를 점점 늘려 가는 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 대통령과 정권 실세들은 가계 소득을 늘리고 혁신적인 분야에 투자해 국민 모두가 과실을 누리는 체제를 목표로 한다. 이것이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성장이라는 ‘문재인 경제’다.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규제를 없애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파이를 늘리자는 보수의 경제와는 출발점이 다르다.

보수 정부가 지향하는 규제개혁 대신 현 정부가 규제혁신이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혁신의 대상인 중소기업에는 지원을 해도 대기업의 비용을 줄여주는 ‘전봇대 뽑기’식 규제개혁은 지금 정부의 구상에 없다. 노무현 정부에서 보수와 사사건건 전면전을 하다가 시간을 낭비한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대리인을 통한 우회적 정책 추진은 그래서 나온 진보의 새로운 프레임일 수 있다.

수출 중심, 대기업 중심인 우리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진보의 생각에 동의한다. 새로운 경제실험이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정권이 일을 맡긴 대리인이 자기의 이익을 좇기 시작하면 한국 경제는 길을 잃게 된다. 대통령은 지금 믿을 만한 대리인을 고용한 것인가.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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