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식씨 이젠 그만 좀”…중년 남성 퇴직자, 천덕꾸러기 취급받지 않으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2일 16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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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후반인 남편은 두 달 전 은퇴했습니다. 이런 날이 언젠가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죠. 그날이 오면 고생한 남편한테 잘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닥치니 그게 말처럼 쉽지 않네요.

처음엔 많이 노력했어요. 20년 이상 몸담은 회사를 떠난 남편이 너무 안쓰럽고, 남편의 축 처진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참 속상했죠. 남편 기죽이고 싶지 않아 직장 다닐 때처럼 밥도 꼬박꼬박 차려주고, 빨래며 청소며 예전처럼 제가 다 했답니다.

하지만 저도 점점 지쳐갑니다. 남편이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이면 세 끼를 다 챙겨줘야 하는데 제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아 때로 너무 힘들고 화가 납니다. 저도 평생 집안일을 했는데, 왜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쉬질 못하는 걸까요?

더욱이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을 생각하면 집안에 있는 남편에게 도통 좋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퇴직금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 대학 등록금은 어찌해야 할지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만 나옵니다.

결국 오늘 터지고 말았습니다. 남편에게 “앞으로 계속 이러고 살 거야? 삼식이 짓 좀 그만해”라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죠. 상처받은 표정을 보니 미안했지만, 이렇게 몇 십 년을 더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접점이 있을까요?


여보,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당신 말에 화가 나 집을 박차고 나왔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 당신이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어. 그동안 괜히 민망해서 하지 못한 말들을 좀 적어보려고 해.

나도 언젠가 퇴직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적응이 쉽진 않아. 그렇게 긴 시간을 회사에 쏟았는데, 직장을 나오고 나니 남은 게 하나도 없네. 퇴직금만으로 남은 30~40년을 어떻게 버티나 앞이 캄캄하고, 우리 애가 직업 없는 아빠를 부끄러워할까 위축도 되고….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눈치 챘겠지.

그래도 힘이 되는 건 역시 가족뿐이야. 회사 출근 마지막 날, 짐을 싸 집에 왔을 때 당신과 아들이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고마워요”라고 말해줬지. 그때 눈물이 날 뻔한 걸 간신히 참았어. 마냥 어리게만 보인 OO이가 “아빠 걱정 마. 나도 열심히 할게”라고 할 땐 신기하고 대견하더라.

그래도 퇴직 후 찾아오는 우울함은 어쩔 수가 없더라고. 다시 일하고 싶지만 이 나이에 직장 찾기가 어디 쉽겠어? 솔직히 당신이 무심코 던진 말들이 나한테 큰 상처가 돼. 당신이 며칠 전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 왔을 때 베란다에 가득 쌓인 빨랫감을 보고 “나 없을 때 집안일 좀 해놓는 게 그렇게 힘드냐”고 했잖아. “나도 바쁘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세탁기 사용법을 잘 몰라. 순간 내가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 됐구나 싶었지. 이제부터 당신이 집안일을 가르쳐주면 나도 열심히 해볼게.

또 한번은 당신이 “돈은 언제 다시 벌려고?”라고 조심스레 물었지. 솔직히 ‘나는 평생 가장이라는 짐을 벗어버릴 수 없는 건가’ 싶어 마음이 무거웠어. 친구들 중엔 아내도 일하는 경우가 적지 않잖아. 남편보다 돈 잘 버는 아내들도 간혹 있고…. 이제 시대가 변했는데 왜 당신은 나만 쳐다볼까 싶어 답답했어. 은퇴 후 경제적인 문제는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열심히 일자리를 알아볼 테니, 당신도 함께 방법을 고민해주면 좋겠어.

나는 애하고 대화하는 게 참 어려워. 그동안 해 뜨기 전 집을 나서서 해진 뒤 집에 들어왔으니 제대로 얼굴 볼 시간이 없었잖아. 말을 걸어보려 하는데, 막상 기회가 생겨도 할 얘기가 없더라고. 결국 “공부는 잘 되니?”로 시작한 대화의 마지막은 늘 “아빠랑 얘기하면 짜증나”란 말로 끝나더라고. 쾅 닫히는 문을 볼 때면 자식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 더 슬퍼. 주말이라도 “아빠 같이 영화 보러 갈래?” 하고 말을 걸어주면 정말 고마울 텐데….

하소연이 길었지? 그래도 요즘 먼저 퇴직한 선배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바뀌어야 할 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해. 어제 만난 선배가 “은퇴는 곧 자기 삶의 전성기”라고 하시더라고. 맞는 말 같아. 회사를 나왔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건 아니잖아. 이제 나도 내 삶에 온전히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라고 생각할래. 그러니 당신도 “나이 많이 먹어서 할 수 있겠어?”라는 말보다 “당신도 잘 할 수 있어, 응원할게”라고 말해줘.

먼저 요리부터 배워보려고 해. 요샌 퇴직하고 요리교실을 다니는 이들이 많더라고. 아내 없이 밥 잘 챙겨먹는 게 퇴직자의 첫 번째 매너라면서? 나도 집 근처 복지관에서 하는 요리교실을 다음주부터 나가볼까 해. 평생 나한테 밥해줘서 정말 고마워. 이제는 내가 당신 밥 차려주는 남편이 될게. 또 조만간 취직자리가 생길 테니 너무 돈 걱정 하지 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앞으로도 서로 믿고 의지하자.

※도움말 주신 기관: 우리마포복지관 서울시50플러스재단 부천인생이모작지원센터 한국남성의전화

위은지 기자 wiz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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