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고혈압 앓던 필리핀 출신 불법체류자, 지하 쪽방서 돌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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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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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한 번 못간 그의 지갑엔 가족에 보낼 100만원이…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 땅을 밟았던 필리핀 노동자가 병을 앓다 입국 8년 만에 혼자 살던 지하 쪽방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서울 도봉경찰서는 필리핀인 불법체류자 B 씨(47)가 3일 오후 10시경 도봉구 쌍문동의 한 빌라 지하방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4일 밝혔다. 집주인 이모 씨(53·여)는 월세를 받으러 갔다가 숨진 B 씨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2004년 1월 직업교육비자로 입국한 B 씨는 2005년부터 불법체류자 신세로 섬유·양말 공장 등에서 7년을 일했다. 3개월 전부터는 양말 공장에서 일했지만 최근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 툭하면 실수를 했다. 상사는 B 씨를 나무라다 지난달 31일 그를 해고했다.

그의 부인은 한국에서 함께 일하다 둘째가 태어난 2005년 아이 둘을 데리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혼자 살게 된 B 씨는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며 한 달에 100만 원 가까이를 가족에게 보냈다. 숨진 B 씨 옆에 놓여 있던 지갑에는 필리핀으로 보내려고 모아둔 현금 100만 원과 이미 보낸 송금 영수증 여러 장이 들어 있었다. B 씨는 돈을 보내기 위해 당뇨병, 고혈압 등 각종 병을 앓으면서도 병원 한 번 제대로 가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아파도 일부러 병원에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얼마나 아끼고 살았는지 집에 먹을 거라고는 TV 앞에 놓인 땅콩 몇 개와 계란 몇 알, 바닥을 드러낸 반찬통의 배추김치가 전부였다”고 말했다.

간이 옷걸이와 다 늘어난 체육복, 낡은 슬리퍼 등이 전부인 6.6m²(약 2평) 남짓한 쪽방에서 가장 비싼 물건은 데스크톱 컴퓨터와 화상카메라, 스피커 5개였다. 가족 얼굴을 보며 통화하기 위해 그가 부린 최고의 사치였다.

옆방에 살던 김모 씨(42·여)는 “B 씨는 공장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에 들어오곤 했다”며 “퇴근한 그가 필리핀어로 가족과 도란도란 통화하는 소리가 벽을 넘어 들리곤 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특별한 외상이 없고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점, 자살 정황이 없는 점으로 미뤄 심장병과 당뇨병을 앓던 그가 돌연사 한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B 씨는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 동료 외국인 노동자들이 찾아오지 않아 더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며 “대부분 불법체류자 신분인 동료들은 혹시 검거될까 두려워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오지 못한 듯하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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