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아이고” 새벽 곡소리 시위… 주민고충에 ‘귀막은 경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집시법 소음기준 4년째 제자리

“아이고 어이야, 아이고 어이야.”

3일 오전 5시 30분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둠 속에서 스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여를 옮길 때 내는 곡소리였다. 소리의 출처는 공사장 입구에 정차한 승합차의 대형 확성기 3개였다.

이날은 한국노총 전국건설산업노조 조합원들이 소속 노조원들의 고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여는 날. 곡소리와 투쟁가가 번갈아 나왔고 “아이고, 아이고, 우릴 죽였다. 개××들이”라며 거친 욕설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

○ 유치원생 등교할 때 울린 곡소리

3일 오전 해가 뜨기 전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 앞에 모인 한국노총 전국건설산업노조원들이 곡소리를 틀고 집회를 하고 있다. 이 현장에서 약 30m 거리에는 100명 이상의 원생이 다니는 유치원이 있다.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
3일 오전 해가 뜨기 전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 앞에 모인 한국노총 전국건설산업노조원들이 곡소리를 틀고 집회를 하고 있다. 이 현장에서 약 30m 거리에는 100명 이상의 원생이 다니는 유치원이 있다.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
집회는 오전 8시 반 무렵까지 이어졌다. 집회 장소는 원생 100여 명이 다니는 유치원과는 30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이따금 엄마 손을 잡고 가던 유치원생들이 큰 소리가 나는 현장을 바라봤다. 학부모들은 잰걸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으로 들어갔다. 이날 오후 유치원 근처에서 만난 학부모 유모 씨(41·여)는 본보 취재진에 “아침부터 아이들에게 장송곡을 들려주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학부모 A 씨(43·여)는 아이들이 집회 현장을 지나가면서 “곡소리를 흉내 내려 해 놀라서 혼을 낸 적도 있다”고 경험담을 전했다. 일반 주민들도 소음 피해를 호소했다.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모 씨(49)는 “가게 안에 라디오를 틀어놓았는데 (소음 때문에) 하나도 안 들릴 정도로 시끄럽다”며 “오전 6시도 안 됐는데 이 시간에 하는 집회가 불법이 아닌 게 이상하다. 나라에서 허락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때와 장소 가리지 않는 집회 소음

이날 본보 취재진이 측정기로 자체 측정한 소음은 80dB. 야간 소음 기준치인 65dB을 훌쩍 넘겨 엄연히 불법 소지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경찰은 “빗소리 때문에 좀 크게 나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곳은 아파트 공사가 시작된 작년부터 노조원들이 수개월째 불규칙적으로 새벽 집회를 열고 있다.

문제는 최근 유치원이나 도서관 근처 등에서 무분별하게 집회가 이어진다는 점이다. 올 8월에는 유치원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은 경기 과천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 앞에서 장송곡을 틀어놓고 집회를 해 학부모들의 우려를 샀다. 한 대기업의 사내유치원이 있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한 건물 앞에서도 올 10월까지 지속적으로 장송곡 집회가 열렸다.

‘정숙’이 필요한 대표적 공간인 도서관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시청 서편 서울도서관 옆쪽에서는 매주 화요일 자유연대 등이 ‘박원순 아들 증인소환 촉구집회’를 연다. 참여 인원은 20명 안팎이지만 대형 스피커와 확성기 차량이 동원된다. 본보 취재진이 집회 현장을 찾은 4일 오전 도서관 안쪽으로 투쟁가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도서관 이용자 김모 씨(62)는 “서울시청 옆이 상징적인 공간이긴 하지만 도서관 옆인데 언제까지 기약 없이 여기서 소음을 내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 규정 있어도 단속은 사실상 어려워

현행법에는 소음과 관련한 단속 기준이 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에 따르면 기준을 초과하는 소음을 발생시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 확성기 사용 중지 명령이나 확성기 일시 보관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에 불응할 경우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5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과료 처분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선에서는 ‘소음 기준’에 맞춰 단속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반응이다. 집시법 시행령에 따른 ‘소음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시행령에 따르면 ‘해뜬 후부터 해지기 전’까지 주거 지역, 학교, 도서관 등에서는 65dB 이하로, ‘해진 후부터 해뜨기 전’에는 60dB 이하를 유지해야 한다. 일반적인 주민들의 생활 패턴과 무관하게 여름철에는 해뜬 후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더 일찍부터 더 늦게까지 소리를 키워 집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피해 지역에서 10분간 소음을 측정해 평균값으로 기준치 초과 여부를 판단한다. 기준치를 훨씬 뛰어넘는 소리를 질러도 다시 몇 분 잠자코 있으면 평균을 맞출 수 있어 꼼수를 부리기 쉽다. 2개 이상의 집회가 겹칠 경우 소음 발생에 대한 책임을 묻기가 더 어렵다.

시행령에 따르면 경찰청장은 3년마다 소음 기준 등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하고 개선 조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현행 소음 기준은 여전히 2014년에 머물러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2017년 소음 기준에 대한 타당성 검토를 했지만 따로 고칠 만한 부분이 없다고 판단해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
#집시법 소음기준#4년째 제자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