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방위 억울함 없게… “상대 피해, 나보다 커도 인정”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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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2014년내 요건 완화… 폭 넓히기로

도둑을 때려 뇌사 상태에 빠뜨린 집주인에게 징역형이 선고된 이른바 ‘도둑 뇌사’ 사건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경찰이 정당방위 수사 지침 수정을 검토하고 나섰다. 경찰은 올해 말까지 현행 정당방위 요건을 개정해 설령 상대방의 피해가 중대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경우 정당방위에 포함시킬 방침이다.

10일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은 현재 8개 항목으로 이뤄진 ‘정당방위 판단요건’을 올해 말까지 완화해 정당방위를 더욱 폭넓게 인정할 계획이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참고하는 자체 정당방위 항목 중 ‘상대방(범죄 피의자)의 피해 정도가 본인(정당방위 행위자)보다 중하지 않아야 한다’는 7항을 개정하기로 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범죄가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상대방의 피해가 자신보다 작아야 정당방위로 인정된다는 것을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논란이 되는 부분이라 개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의 정당방위 요건 개정에는 최근 논란이 불거진 춘천지법 원주지원의 ‘도둑 뇌사’ 판결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원주지원은 올해 3월 강원 원주시 남원로 자신의 집에 침입한 A 씨(55)를 때린 최모 씨(20)에게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최 씨가 도망치던 A 씨 머리를 발로 차고 알루미늄 빨래건조대 등으로 때려 뇌사 상태에 빠뜨린 혐의였다. 당시 최 씨 측은 “어머니와 누나가 자던 방에서 괴한이 튀어나와 강간이나 살인범으로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현행 경찰의 정당방위 요건이 주로 ‘쌍방폭행’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도 개정 이유 중 하나다. 경찰의 정당방위 판단요건 3항에는 ‘먼저 폭력행위를 하지 않아야’ 정당방위로 인정된다. 두 명이 서로 때린 사건에서는 먼저 때린 사람이 폭력을 멈추면 정당방위자도 폭력을 멈춰야 한다. 하지만 집에 침입한 괴한을 제압하는 정당방위를 하려면 먼저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경찰 관계자는 “문제가 되는 2, 3개 조항을 고쳐 정당방위의 범위를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최근 들어 경찰이 정당방위를 예전보다 유연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에 따르면 폭력사건 수사지침이 개정된 올해 4월 22일부터 11월 5일까지 정당방위로 입건을 피하거나 불기소 처분된 사람은 475명, 건수로는 447건에 이른다. 경찰 관계자는 “지침 개정 전까지 정당방위를 따로 집계하지 않아 비교 대상이 없다”면서도 “이미 정당방위 인정 건수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이며 규정을 개정하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예전 같으면 폭력으로 경찰에 입건될 사건이 정당방위로 인정되는 사례도 늘었다. 8월 인천 남동구의 한 빌라 주인인 최모 씨는 자택 화단에 들어와 아내와 딸을 훔쳐보다 도망치던 박모 씨를 붙잡아 전치 3주의 상처를 입혔다. 최 씨가 먼저 밀치고 주먹으로 때린 사건이라 예전 같으면 폭행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정당방위로 입건을 면했다. 대구 서구의 안모 씨 역시 9월에 술 취한 취객이 집에 들어와 욕을 하고 얼굴을 때리자 취객의 손가락을 깨물었지만 정당방위가 인정됐다.

안준성 경희대 객원교수(국제대학원·미국 변호사)는 “미국에서는 정당방위가 일어난 장소를 따져 개인의 집을 침입하면 정당방위 요건을 넓게 인정한다”며 “법관과 국민 사이에 정당방위를 둘러싼 이견이 존재하는 만큼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은 폭력 사건을 국민참여재판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정당방위#뇌사#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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