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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이 존경받는 사회]제2연평해전 6인의 용사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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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이 존경받는 사회]제2연평해전 6인의 용사도 잊지 않겠습니다

동아일보입력 2010-05-24 03:00수정 2010-05-25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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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에 묻히고, 정부는 외면… ‘잊혀진 용사’ 될뻔한 그들

교전 직후부터 홀대
DJ, 월드컵 보러 일본행
시민분향소도 설치 안해

모행사 없어질뻔
2007 년 “내년엔 가족끼리”
해군, 경비지원 난색 표명
지휘계통 책임 어물쩍
교전위험 사전보고 무시
당시 국방장관 “취재 거부”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6시. 참수리급 해군고속정 357호가 서해 연평도 북방한계선(NLL) 경계 순찰에 나섰다. 화창한 날씨에 파도도 잠잠했다. 꽃게잡이 어선들을 보호하며 참수리 357호는 NLL 인근까지 나갔다.

사건이 터진 것은 오전 10시 25분. 제2연평해전 생존자인 당시 갑판병 상병 권기형 씨(29)는 지금도 그때 방송 내용을 잊지 못한다. 포에 맞는 충격과 함께 경보벨이 울렸다. “실전, 총원 전투배치”를 알리는 목소리가 참수리정 안에 울렸다. 함교로 올라간 권 씨는 적의 경비정을 향해 소총을 쐈다. 그러다 왼손을 총에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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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 고속정장 윤영하 소령(당시는 대위)과 부정장 이희완 중위가 모두 쓰러졌다. “전우들의 피를 보고 한 손으로 미친 듯이 총을 쏘았습니다.” 이날 참수리 357호 승선자 중 4명이 전사했다. 한상국 중사가 실종됐고 19명이 다쳤다. 박동혁 병장이 중상으로 84일 만에 숨지고 한 중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사자는 6명으로 늘어났다. 제2연평해전은 그렇게 끝났다.

○ 정부조차 외면한 해전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올해로 8년을 맞는 제2연평해전을 ‘잊혀진 전투’라고 말했다. 2차 연평해전은 1999년 발생한 1차 연평해전과 같은 ‘일방적인 대승(大勝)’은 아니었다. 1차 연평해전 당시 우리 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북한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경비정 5정을 격파해 당시 편대장 최용규 소령 등 6명이 1계급 특진했다.

제2연평해전은 천안함 침몰사건과 같은 국민적인 추모도 없었다. 교전 이틀 후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열렸던 합동영결식에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이한동 국무총리, 김동신 국방부 장관, 이남신 합참의장 등 국가지도자와 군 지휘부 대부분이 참석하지 않았다. 영결식 참석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손학규 당시 경기도지사, 장정길 해군참모총장 정도였다. 여당이었던 민주당과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들 역시 참석하지 않았다. ‘햇볕정책’을 내세운 김대중 정부는 제2연평해전을 외면했고 당시 국민과 언론은 4강 신화를 이룬 월드컵경기에 취해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사고 다음 날인 30일 월드컵 결승전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으로 출국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54)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68)는 “서해에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외국에 있던 대통령도 급히 귀국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그때 ‘홀대’ 논란에 대해 “당시 정권 차원에서 전사자들의 예우도 중요했지만 안정된 남북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해 결국 대통령이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노무현정부에서도 연평해전 냉대는 계속됐다. 2007년에는 추모 행사가 없어질 뻔했다. 윤 씨는 “2007년 5월 청와대에 초청받은 유가족들은 ‘추모 행사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질문을 받았다”며 “규정은 없지만 육군과 공군이 순직자 추모를 2년 동안 하니 그에 맞추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군 관계자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해군은 이후 가족들에게 “지금까지는 해군2함대 차원에서 제2연평해전 추모식을 치렀지만 2008년 6주기부터는 가족 차원의 추모식이 될 것”이라며 “경비 지원 등은 할 수 없지만 장소는 빌려주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2008년 추모식부터 행사를 국가보훈처 주관의 국가 행사로 격상시키고 명칭 역시 ‘서해교전’에서 ‘제2연평해전’으로 바꿨다. 올해 발생한 천안함 사건 이후엔 뒤늦게 사회 각계에서 제2연평해전 희생자 6명을 재조명하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2002년 당시 국군 대북감청부대장을 지낸 한철용 예비역 소장(64)은 연평해전 직전인 6월 13일과 27일 두 번에 걸쳐 서해에서 교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그는 “당시 북한군 감청에서 ‘포격’이라는 단어를 읽었다”며 “국방부에 즉각 보고했지만 당시 군 수뇌부는 교전 위험을 해군에 알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약 교전 가능성을 알았다면 2차 연평해전의 결과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 장거리 교전에서는 장비가 우수한 우리 군이 유리한데 이날은 단순히 NLL에서 북 경비정을 교전 없이 밀어낸다는 판단에 400m 앞까지 다가섰다는 것. 당시 전쟁 위험을 경고한 한 전 소장의 보고 내용은 해군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한 전 소장은 국회 청문회에서 이런 내용을 밝히고 36년 동안 입었던 군복을 벗었다.

당시 군 지휘 계통에 있던 김동신 전 국방부 장관과 이준 전 국방부 장관, 장정길 전 해군참모총장 등은 동아일보의 관련 취재에 답하지 않았다. 김 전 장관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전 장관과 장 전 참모총장은 연평해전 이야기를 꺼내자 “(인터뷰) 안 한다”고만 말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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